[조선시대]병자호란의 잊혀진 전투, 강화도 방어전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청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나 빨랐기 때문에 인조와 소현세자는 미처 강화도로 도망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가야 했다. 다만 인조와 소현세자 이외의 왕족들, 특히 봉림대군(훗날 효종이 되는 사람)은 강화도로 이동하는데 성공했다.
북방 오랑캐들은 강화도에 건너오지 못할 거라는 믿음이었을까? 청군은 어이가 없었다. 강화해협 따위 충분히 건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는 자신의 동생 '오소리'를 불러 강화도 공략을 맡겼다.
오소리 라는 의미의 도르곤(Dorgon)으로 불렸던 애신각라다이곤 장군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 공략에 나섰다.
조선군은 청군이 강화해협을 건널 수 있을 것이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방비를 게을리 하고 있었다.
청군은 먼저 홍이포(네덜란드인들이 전수해준 기술로 만든 장거리 대포)를 쏘며 조선군을 위협했다. 그리고나서 청군은 태연히 배를 타고 강화해협을 건너 강화도에 상륙했는데 조선군은 반격하지 않았다.
청군이 상륙하자 강화도 수비를 책임진 김경징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쳤다. 김경징은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간 영의정 김류의 아들이다. 지휘관을 잃은 수백명의 조선군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모두 전사했다. 이제 청군의 앞을 가로막는 세력은 그걸로 소멸된 셈이엇다.
도르곤이 받은 명령은 봉림대군을 생포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함부로 진격하지 않고 군대를 주둔시키고 위협만 했다. 봉림대군은 기개가 있어서 군대를 이끌고 반격을 했으나 아무 피해도 주지 못했다.
봉림대군을 따라 강화도에 들어왔던 김상용이 화악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며 느와르를 찍다가 청군이 다가오자 담뱃불을 화약더미에 붙여 자폭했다. 김상용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화친은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던 강경파 김상헌의 형이었다.
김상용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충의를 지키겠다는 조선 선비의 자결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민폐였다. 김상용이 화약 재고에 불을 지른 바람에 조선군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도르곤은 조선군에게 저항할 무기가 없음을 알고 강화산성을 포위하고 항복하라고 윽박질렀다. 결국 봉림대군이 백성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항복했다.
크게 만족한 도르곤은 봉림대군을 융숭히 대우하고 청군에게 민가를 약탈하지 않도록 단속했다. 그리고 봉림대군을 대리고 강화도를 떠났다. 그런데 도르곤이 떠나자 청나라군은 기강이 해이해졌고 민가를 약탈하고 여자들을 겁탈하고 다녔다. 자기 주제를 망각한 약소국의 운명이지만. 병자호란이 터지기 전, 아무 근거도 없이 청나라를 만만히 보던 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던 운명이었다.
병자호란이 끝나자 인조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김류의 눈치를 보았고 김경징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 결국 귀양 보내는 걸로 퉁치려고 했는데 다른놈은 몰라도 김경징만은 절대로 살려두면 안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여론이 너무 안 좋아서 김류도 감히 그걸 막지 못했다. 결국 인조는 김경징에게 사약을 내렸다. 김경징은 죽는 순간까지 김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여 조선 선비들에게도 백성들에게도 조롱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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