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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3대 황제 칼리굴라 

칼리굴라는 어떤 배경을 가졌길래 어거스투스, 티베리우스에 이어 3대 로마황제 자리에 올랐을까?

칼리굴라의 실제 이름은 Gaius Julius Caesar(실제 줄리우스 시저의 이름과 완전히 똑같음)이다. 하지만 2-3살 정도 되었던 유아시절 훌륭한 장군이었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를 따라 북부 게르마니아지방의 전쟁에 따라가게 된다.

그때 아버지가 군인복장과 똑같은 옷을 유아사이즈로 만들어 칼리굴라에게 입혔다. 그 옷을 입고 여기저기 따라다니던 꼬마 칼리굴라를 보고 그 모습을 귀여워한 군인들이 작은 군인신발이라는 뜻의 "Caligula"라는 별명을 붙여주게 된다.

그래서 그게 굳어서 실제 이름보다 평소에도 칼리굴라라고 많이 불리었다.(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별명을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

이름이 되어버린 별명, 작은 군화(caligula)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화려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먼저 할머니가 초대황제 어거스투스의 부인 리비아(Livia, 어거스투스와 결혼하기 전 이전 남편과 사이의 아들, 드루서스(Drusus the elder)가 아버지이다.), 따라서 큰삼촌이 2대황제 티베리우스(드루서스의 형), 외할머니가 어거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Octavia), 외할아버지가 나중 클레오파트라와 바람난 것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k Antony)이다.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게르마니쿠스는 당시 전쟁터에서도 승승장구 하는 등 군인들 및 로마 시민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많은 장군이었다.

하지만 조카의 이런 인기를 시샘한 황제 티베리우스에 의해 33세의 나이로 칼리굴라가 7살때 독살당하고 만다. 또한 얼마안되어 칼리굴라의 어머니와 두 형도 먼 섬에 유배보내지게 되고 세 여동생과 칼리굴라만 증조할머니인 리비아에게 보내져 키워지게 된다.

그러다 리비아가 87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죽자 할머니인 안토니아(Antonia Minor)에게 보내져서 양육되게 된다. 

부모를 잃은 칼리굴라를 키워준 증조할머니 리비아(Livia Drusilla). 한때 한미모해서 애 둘데리고 초대황제의 황후자리를 꿰찬다. 그 후 극진히 황제를 모셔 시대의 바람직한 아내상으로 여겨지며, 심지어 남편에게 예쁜여자를 공수하는 것도 직접 도맡아한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칼리굴라는 당장 내일이라도 티베리우스가 군인을 보내 죽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니 칼리굴라는 그야말로 어떻게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거다.

그러다 19살이 된 칼리굴라는 어느날 갑자기 당시 카프리섬의 궁전에서 칩거생활중이던 티베리우스의 부름을 받는다. 왜 불렀을까?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라는 당시 칼리굴라의 고뇌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티베리우스의 카프리섬 황궁 (Villa Jovis) 상상도 (Weichardt, 1900)

하지만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부른 이유는 후계자로 내정했던 자신의 아들, 드루서스(Drusus the Younger)가 아내 Livilla와 당시 황실근위대 대장이었던 세자누스(Sejanus)의 공모로 자연사처럼 보이는 독살을 당하게 되며 갑작스러운 후계자공백이 생기자 아직 10대 초반으로 너무 어린 자신의 친손자인 게멜리우스(Gemelius)와 함께 후계자 후보로 시험해보려는 것이 이유였다.

그 후 6년의 시간동안 칼리굴라는 속마음을 절대 밖으로 보이지않은 채 충실한 종으로써 티베리우스를 모시면서 살았다. 후대 역사가 Tacitus가 당시 목격자였던 정치가 Passienus의 표현을 기록한 것을 보면 "이 이전엔 이보다 더 훌륭한 하인은 없었고, 그보다 더 못된 주인은 없었다"고 써있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개인욕실에서 당시 수많은 아이들과 난잡한 생활을 즐겼고 칼리굴라도 그 상대 중 하나였다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렇게 신빙성이 높지는 않다는게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다. 

칼리굴라의 부모, 형제를 죽인 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2대황제 티베리우스

그러다 25세가 되던 해, 티베리우스는 결국 후계자를 둘 중 하나로 확실하게 지명하지 못한 채 칼리굴라와 게멜리우스를 공동후계자로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77세를 일기로 죽게된다. 이 죽음에 대해서도 사실 말이 많자. 죽어가던 티베리우스의 상태가 너무 악화되어 죽은 줄 알았던 마크로가 티베리우스는 죽었고 칼리굴라를 후계자로 선포했다가 다시 티베리우스가 회복하자 후사가 두려워 죽였다는 (독살/베게로 질식사/밥을 안줘 아사 등등) 말도 있고 그냥 자연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결국 티베리우스의 뜻은 마크로에 의해서 무시되고 칼리굴라가 단독 후계자로 인정받게 된다. 칼리굴라는 게멜리우스를 양아들 및 후계자로 지정하는 뜻밖의 모습을 보인다. 티베리우스에 의해 너무 힘든 삶을 살았던 칼리굴라는 그 악행의 고리를 끊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로마로 돌아온 칼리굴라는 로마시민들의 엄청난 환영을 받는다. 11년간이나 로마를 비운 이전황제 티베리우스를 싫어하던 로마시민들에겐 죽을 당시까지도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칼리굴라의 황제로써의 로마로의 귀환이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실제로 황제가 되고 로마로 돌아와 6개월간 반역죄를 없애고, 유배되었던 사람들도 풀어주고, 세금 감면, 각종 행사개최 등 의회와 국민들 사이에 무척 높은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실제 이 6개월간의 선정을 칼리굴라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황제가 된 후 가장 먼저 한 것중에 하나가 죽은 어머니와 형들의 재를 수거해 가족묘에 합장한 것 (Le Sueur, 1647) 

하지만 아마도 누군가의 독살시도로 인해 갑자기 사경을 해메게 되고 간신히 회복하고 나서부터 누군가가 자기 목숨을 노린다는 것을 알게된 칼리굴라는 예전 선했던 모습을 잃고 슬슬 편집증/정신병적인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자신이 후계자로 지정했던 게멜리우스와 황실호위대대장인 마크로를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주변인물 숙청작업에 들어간다.

이때 자신의 어머니와 형을 죽이자는데 투표한 수많은 의원들도 다 죽이는 등 공포정치를 시작하고 또한,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며 자신을 위한 수많은 기념물들을 건설 및 각종 행사주최로 국가재정을 거덜나게 한다.

또한 자기의 세 여동생(Agrippina the Younger, Drusilla, Livilla)을 불러와 황실에서 같이 살기 시작하는데, 칼리굴라를 싫어했던 후대역사가에 따르면 이 세 여동생들과 다른 손님들을 초대한 상황에서 공공연히 성적 행각을 벌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후대 역사가인 Suetonius와 Cassius Dio의 기록에만 나오는데 신빙성엔 의문이 있음.)

어린시절 가족들이 다 죽임을 당해 남은 세 여동생을 극진히 챙길 수 밖에 없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중 예쁜걸로 소문난 둘째여동생 Drusilla를 특히 무척 더 좋아했다는 건 여러 기록상 확실히 사실인 듯 한다. Drusilla가 갑자기 열병으로 죽게되자 초대황제의 부인이었던 리비아조차 받지못한 여신으로 추대하며 대대적인 사원건설 등 또다시 수많은 재정을 낭비하게 된다. 또한 유일한 딸의 이름도 Drusilla라고 지었다.

칼리굴라가 그토록 좋아했던 둘째여동생 드루실라

후에 여동생인 Agrippina the Younger(전편 클라우디스에 나오는 희대의 악처, 그 아그리피나 맞음)의 주도로 또다른 암살시도가 있자 여동생 둘은 유배보내고 병으로 죽은 드루실라의 남편은 사형에 처한다.

이쯤에서 칼리굴라의 악행을 보면,(역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토론거리이다.)

1. 칼리굴라는 대머리여서 그걸 감추느라 무척 노력했다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경우 바로 사형에 처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머리숱이 염소를 닮았다는 말이 돌자 칼리굴라 앞에서 염소란 말만 꺼내도 역시 사형에 처해졌다.

2. 칼리굴라는 의회를 너무 싫어해서 자신의 애마인 Incitatus를 의회의 의장(Consul)으로 임명한다고 선언했다고 결국 사제(priest)에 임명했다.(의회를 싫어했기 때문에 의원들이 대부분이었던 당대/후대 역사가들의 미움을 받음.)

3. 자신의 아내인 Caesonia를 벌거벗겨서 자신의 친구들 앞에서 행진하게 했다.

4. 의회 의원들을 부부동반으로 초대한 저녁자리에서 남편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데리고 가 겁탈하고 그 남편에게 자랑한다.

5. 스스로를 신이라 착각, 한밤중 달과 의사소통을 한다.

6. 지금의 영국인 브리타니아(Britania) 정벌에 실패하자 그 탓을 바다의 신 포세이돈으로 돌리며 포세이돈에게 전쟁을 선포, 병사들이 노를 가지고 바닷물을 철퍼덕거리며 때리게 만든다. 그러다 이 전쟁 승리의 전리품이라며 병사들에게 조개껍질을 줍게 한 후 로마로 가지고 온다.

7. 밥먹으며 죄수를 고문하며 죽이는 것을 관람.

8. 원형경기장 행사에서 내용이 지루하다며 한쪽 섹션의 관중을 전부 경기장으로 내려보내 맹수들의 밥이 되게한다.

9. 예루살렘 유대교사원에 자신의 대형석상을 건립, 유대신대신 자신을 숭배하게 한다.

등등 여럿이 전해지고 있다.

이런 악행을 벌이며 살다 결국 제위 3년 10개월만에 글래디에이터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황실의 지하도에서 황실호위대 소속 군인 Cassius Chaerea와 의회의원들의 공모로 칼에 30번 찔리며 28세의 어린 나이에 죽게된다.

후대 역사가 Suetonius는 칼리굴라의 죽음과 줄리우스 시저의 죽음을 놓고 둘다 이름이 Gaius Julius Caesar고, 30번 칼에 찔려 죽었고, 암살공모자의 이름이 Cassius다라고 하며 묘한 공통점이 있다고 쓰고 있다. (링컨과 JFK의 암살에 공통점이 있다는 가십거리의 2000년 전 버전) 실제 칼리굴라가 죽은 지하통로가 2008년 로마의 Palatine Hill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칼리굴라의 죽음 (Bartolomeo Pinelli, 1810)

칼리굴라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은 칼리굴라에 충성을 다하던 게르만계통 황실호위병들이 자신이 모시던 황제의 죽음에 대한 분노로 상대를 가리지않고 다 죽이며 황실을 휘젓고 다닌다..

실제 어린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바로 악행만 저지르다 죽었기 때문에 아무리 좋게 쓰려고 해봐도 황제로써 별다른 성과는 없어서 쓸게 없다. 그나마 업적이 북아프리카 현재의 모로코지방인 복속 왕국(client kingdom) 모리타니아(Mauretania)를 직할영토로 만들어 두개의 Province로 만든게 있는데, 그 과정을 보면 복속왕(client king)이었던 Ptolemy를 황실로 초청한 다음 갑작스럽게 암살해버리고 바로 직할영토화 한거라 별다른 군사작전조차 없었던 그야말로 칼리굴라다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계속된 반란에 완전히 복속되는 데는 시간이 걸려서 안정화된 시기는 후대황제인 클라우디우스 시기이다.

칼리굴라 치세의 로마영토, 왼쪽아래 분홍색지역이 칼리굴라가 직할영토로 바꾼 모리타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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