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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통일왕조 주나라의 권위는 이민족의 침략과 멍청한 군주 때문에 땅바닥에 떨어졌다.

중원은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나라로 갈라져 전쟁을 거듭하고, 국력이 강했던 제후국이 패자(覇者)를 칭하는 춘추시대가 계속된다.

당시 남쪽의 초나라는 수백 개의 제후국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초강대국이었다.

중원의 세 번째 패자이자 초나라의 21대 왕인 장왕(莊王)은 국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제후국 중 최초로 ‘왕(王)’을 자처했다.

첫 번째 패자인 제환공, 두 번째 패자인 진문공도 주나라의 신하로서 왕호는 안 썼지만, 주나라 왕실과 원래 관계가 적었던 초나라는 선례를 무시할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때는 기원전 550년 경,

장왕의 후손인 27대 평왕(平王)이 초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평왕의 아들 태자 건은 ‘웅건(熊建)’이었는데(초나라 왕실은 웅씨) 그에게는 오사(伍奢) 비무기(費無忌)라는 스승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오사에게 밀렸던 비무기는 야심이 큰 그는 그게 불만이었다.

그런데 마침 태자비가 될 여인이 진(秦)나라 출신의 절세가인이었다.

비무기는 태자가 아닌 왕에게 줄을 댈 생각을 먹고 평왕에게,

“제가 태자의 소부(少傅, 작은 스승)로서 태자비가 될 여인을 봤는데, 너무나 아름다워 왕께서 후궁 삼으시고, 태자비한테는 딴 여자를 줘도 될 듯합니다.”

한심한 의견이었으나 평왕도 어지간한 등신이었는지 그 의견을 받아들이고 지 며느리를 뺏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총애를 받던 비무기도 큰 고민에 휩싸인다.

평왕은 아저씨인데 태자는 청년이고 언젠가 초나라의 왕이 될 인물이다.

“과연 자기 아내를 뺏긴 태자와 스승 오사가 그 때에도 날 살려줄까?”

비무기는 입술이 부르트도록 평왕과 태자 사이를 이간질했고, 결국 평왕은 반역죄를 들어 태자를 소환시켰으나 눈치 빠른 태자는 송나라로 도망쳤다.

결국 잡혀 들어온 것은 태자의 스승 오사와 그의 장남 오상(伍尙)이었다.

원래는 차남이었던 오운(伍員)도 잡힐 운명이었으나, 잽싸게 도망친 나머지, 오사와 오상만 처형당한다.

그런데 도망친 오운이 바로 희대의 복수귀이자 고사성어 제조기인 오자서(伍子胥)였다.

복수를 꿈꾼 그는 일단 도망친 태자와 함께 정(鄭)나라로 이동한다.

태자와 함께 정나라를 집어삼키고 국력을 키워 초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으나, 태자는 등에 종기가 나서 아파하는 노예를 매질했고, 앙심을 품은 노예는 다 밀고해버린다.

노예에게서 오자서의 쿠데타 계획을 들은 정나라 정공은 몹시 분노해서 태자 건을 잡아 죽여 버리지만, 오자서는 거기서도 도망쳐 나왔다.

그는 태자 건의 아들과 함께 계속 도망자 인생을 이어간다.

초나라와 정나라 모두에게 쫓겨 오(吳)나라로 향하는 오자서는 초와 오나라 국경수비대장이었던 신포서가 그의 친구였기에 천행으로 국경까지 이른다.

오자서는 친구 신포서에게 이런 선언을 한다.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곤조를 부리는 오자서에게 신포서는 이렇게 답한다.

“그렇다면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지켜낼 것이다.”

국경에는 강 하나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추격자에게 쫓기던 오자서의 눈에는 쪽배와 한 노인네, 그에게 도강을 부탁한다.

추격자들은 배 위의 노인에게 소리친다.

“이봐 영감! 머리 희끗하고 상판 긴 놈 한 명 거기 안탔어?”

그러나 노 젓는 노인은 귀머거리였는지 수차례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았고 오자서는 무사히 강을 건넌다.

강을 건넌 오자서는 너무 큰 감사함에 자신이 가진 보검을 노인에게 건넸다.

그러나 노인에게서 뜻밖의 말이 나온다.

“내가 그거 받을 바에는 오자서란 인간을 신고하고 포상으로 천금도 받았겠지”

그는 배를 태워달라는 사내가 오자서인 것도 알았고, 귀머거리도 아니었다.

멀리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며 오자서는 칼을 풀고 오랜 시간 절을 할 뿐이었다.

몇 달 새 너무 큰 고생을 한 오자서는 젊은 나이에 머리와 눈썹이 하얗게 새버렸다

어쨌든 그는 그길로 오나라의 공자 ‘광(光)’를 만나는데, 공자 광은 원래대로였다면 오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었지만, 사촌동생인 ‘요(僚)’에게 뺏긴 상황.

망명객 오자서는 자객 ‘전제(專諸)’를 추천한다.

전제는 상당히 담력이 컸으며, 공자 광과 오자서는 그를 국왕인 요의 하인으로 발탁시켜준다.

그러던 중 어느날 오자서는 명검 한 자루와 평생 그의 가족을 챙겨준다는 약속을 전제에게 준다.

전제는 그 명검을 생선요리의 뱃속에 넣어 요의 식탁에 가져갔고, 비명도 없을 만큼 단칼에 찔러 죽였고, 그 명검은 생선 뱃속에서 나왔다는 뜻으로 '어장(魚腸)'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그렇게 공자 광은 오나라 왕이 되었으니 그가 오왕 ‘합려(闔閭)’이다.

그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오자서와 함께, 제나라 출신 천재 병법가를 스카웃한다.

그가 바로 손무(孫武), <손자병법>의 손자이다.

여담으로 손자는 군대를 움직이는데 기강을 제일 중시했다.

합려의 허락을 받고 그의 180명 궁녀들을 모조리 모아 진짜사나이 여군특집을 찍는다.

그러나 창 한 자루 안 잡아본 궁녀들은 조교가 앞에서 뭐라 떠들든 개판 5분전을 유지했고 참다못한 손자는 본보기로 아끼는 궁녀 두 명을 앞으로 끌어낸다.

합려가 “죽일 필요 있습니까?”라고 청했지만 손자는 “군령은 왕명보다도 지엄한 법입니다.”라며 거절한 후 처형했고, 궁녀 군대는 그 순간부터 엄정한 군기를 유지했다.

오나라는 오자서와 손자를 기용한 순간부터 승승장구했으며 오자서는 복수의 꿈에 부풀었다.

수많은 인재를 끌어모았고 그중에 ‘백비(伯嚭)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의 가족 역시 초나라 왕에게 몰살당했다.

능력은 뛰어나지만 물욕이 심하다는 반대 의견에도 오자서는 그를 기용했다.

오자서는, "같은(同) 병(病)을 앓는 사람들은 서로(相) 동정하는(憐) 법이다. 백비는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으니 나를 잘 이해할 것"

이라는 말을 했고, 여기서 나온 말이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백비는 뒷날 오자서의 뒷통수를 크게 친다.

그러던 중 기원전 516년, 오자서의 불구대천 원수 초평왕이 자연사한다.

오자서는 그 소식을 듣자 몇 날을 통곡하면서 지낼 뿐이었다.

그 후로 10년이 지난 기원전 506년, 결전의 순간.

오나라는 채(蔡), 당(唐)나라와 군사동맹을 체결한 후 강병을 앞세워 초나라로 쳐들어간다.

백거(柏擧, 지금의 우한武漢 북부)에서 초나라 군대를 아작낸 오나라 군대는 당당히 초의 도읍, 영(郢)에 입성한다.

오자서는 아버지 오사의 원수를 꿈에도 잊지 않고 있었고,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죽은 지 10년 된 시체를 끄집어낸다.

평왕의 시체는 뒷날의 진시황처럼 수은에 담가놓은 상태였고, 관짝을 열어본 오자서는 평왕의 시체가 온전한 것에 더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노기충천한 오자서, 아버지와 형에게 먼저 고하고는 쇠로 만든 채찍으로 시체에 300대의 매질을 했다.

평왕의 시체가 완전히 가루조각이 나서야 그는 매질을 그쳤다.

뒷사람들은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에 매질한 이 일을 ‘굴묘편시(掘墓鞭屍)’라고 하고 있으니 통쾌한 복수, 또는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컫는 말이 됐다.

오나라 군을 피해 도망간 친구 신포서는 사람을 시켜 오자서에게 말을 전한다.

“어떻게 그리 심한 짓을? 한 때 평왕을 섬겼던 신하로 네가 그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을 들은 오자서는 태연히 답신을 외쳤다.

“일모도원(日暮途遠), 도행역시(倒行逆施)!

해는 저물었는데 가야할 길은 머니, 행동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비장함이 넘치는 말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오나라에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오나라의 이웃에는 월(越)나라가 있었는데, 평소에 오랑캐라 무시하던 이들이 오나라로 빈집털이 온 것.

초나라 멸망을 눈앞에 둔 합려는 부랴부랴 돌아와 막아내지만, 이때부터 월나라는 원수가 된다.

월나라 35대왕 구천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난 기원전 496년,

오나라는 빈집털이의 복수를 위해 월나라를 쳐들어간다.

그러나 월나라 국왕 '구천(勾踐)'에게도 오자서, 손자 급의 전략가가 있었으니, 바로 ‘범려(范蠡)’

범려는 1940년대 쪽바리들도 깜짝 놀랄 전술을 사용하는데, 자살특공대가 그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부대는 공격 같은 건 안했으므로 ‘자살부대’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범려는 사형수들을 모아놓고, 가족들에게 후한 대우를 약속한다.

사형수들로 구성된 자살부대 수십 명은 오나라군 앞에 와서 갑자기 칼을 빼더니, 오나라군이 아닌 자신의 목에 칼을 찌르면서 단체 자살을 선보인다.

너무나 황당한 광경에 어리둥절한 오나라군은 자기 위치고 뭐고 다 벗어나서 이 진풍경을 구경했고, 그 사이에 몰래 우회한 월나라군의 별동대는 오나라군의 측면을 털기 시작한다.

범려의 승리이자 오나라의 완패. 합려는 전투에서의 상처가 도져 죽음까지 이른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유언을 남긴다.

“부차야, 절대로 내 원수를 잊지 말거라.”

부차는 오나라의 왕위에 오른 순간부터 편한 잠자리를 거부한다.

그는 늘 섶나무(가시나무) 위에서 잠을 잤으며 사람을 늘 자신의 방 앞에 세워두고 자신이 지나갈 때마다 이렇게 외치게 했다.

“夫差而爾忘句踐殺爾父乎?”

“부차야 너는 구천이 아비를 죽인 원수를 잊었느냐?”

구천이 2500년 전 직접 사용한 '월왕구천자작용검', 청동이라 아직까지도 시퍼렇게 날이 살아있다.

부차와 오자서는 서로 힘을 모아 월나라를 쓰러뜨리기 위해 국력을 키웠고, 이 소식은 이웃 월나라 구천의 귀에 곧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구천은 오나라의 세력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해 침공을 계획한다.

책사 범려는 간곡하게 구천을 말렸지만 그는 끝내 범려의 말을 듣지 않았고, 3만의 월나라 병사는 부초(夫椒)에서 오나라군에게 작살이 나고 만다.

패배한 구천은 남은 부하 5천여 명을 월나라 회계에 모이게 하고, 신하인 ‘문종(文種)’을 오나라에 보내 화친을 요청했다. 그는 물욕에 약한 백비에게 온갖 재물을 바치며 구워삶았다.

재물에 혹한 백비는 즉각 효과를 발휘해 구천과 월나라 신하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물론 부차도 큰 선물을 두 개 받았으니,

월왕 구천과 왕비를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첫 번째였고, 서호의 미녀, 중국사 최고의 절세미인 '서시(西施)'가 바로 나머지였다.

그녀는 야사에서, 범려의 애인이지만 월나라를 구하기 위해 희생한 여자로 그려진다.

원수이자 왕을 노비로 삼고, 미인과 재물까지 얻으니 부차는 신나서 복수를 잊었다.

간신 백비가 계속 꼬드기는 가운데, 오자서는 무조건 구천을 죽이라고 청한다.

“爲虺弗摧, 爲蛇若何”

“새끼 뱀일 때 잡지 않으면 나중에 큰 뱀이 되어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백비의 로비와 미인 서시에게 눈이 돌아간 부차에게는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는 부차가 몸이 안 좋다고 말 하자, 구천은 그의 똥까지 먹으면서 충성을 맹세했다.

그런 구천에게 부차는 완전히 맘을 놓아, 다시 월나라로 돌려보낸다.

그러나 부차가 가시나무 위에서 잠을 자며 복수를 다짐하듯, 구천은 천장에 쓸개를 매달고 잠자리마다 쓰디쓴 그것을 맛보면서 이렇게 다짐한다.

“汝忘會稽之恥邪”

“너는 회계산에서의 치욕을 잊었느냐!”

이것이 그 유명한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의 유래이다.

오나라의 국력은 강해졌고, 부차는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여 죄다 제패하고 싶었지만, 오자서는 여기서도 브레이크를 건다.

"병으로 치면 제나라는 피부병이고, 월나라는 가슴 속의 병(心腹之患)이니, 월나라가 더 급한 것입니다."

부차는 다시 오자서를 무시하고 북쪽 제(齊)나라와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심복지환(心腹之患)'이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어 낸다.

자꾸 자기를 거스르는 오자서. 부차는 그가 맘에 들지 않았고, 기원전 485년, 범려의 반간계까지 성공해 그는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한다.

명검 촉루(屬鏤)를 받은 오자서는 그 강경한 성격에 분노부터 한다.

자결하며 부차를 꾸짖는 오자서, 실제로는 따로 죽었을 것이다

“드디어 부차가 사람을 의심할 수 있게 됐는가? 그러나 그 대상이 구천과 범려가 아니구나.”

그러면서 그는 결국 오나라가 망하게 될 것임을 계속 얘기한다.

“必樹吾墓檟. 檟可材也”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라. 그것으로 부차의 관을 만들어라.”

“抉吾目懸東門, 以觀越兵之滅吳”

“내 눈을 뽑아 동문에 걸어라,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망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부차는 당연히 저 말을 무시했고, 시신을 가죽자루에 담아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가 죽어도 한동안 오나라는 제나라를 격파하고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기원전 484년, 제나라 이웃 진(晉)나라까지도 오나라와 선전포고한다. 

기회를 엿보던 구천마저도 후방에서 전쟁을 일으키니 오나라는 세 개의 적을 두게 되었다.

월나라를 만만히 보던 부차는 맞서 싸웠으나, 오나라 수도 고소(姑蘇)에서 참패하고 만다.

오월쟁패의 영웅들, 왼쪽부터 범려, 문종, 구천, 부차, 오자서, 백비

순식간에 입장이 뒤바낀 부차와 구천

자결하려는 부차를 신하들이 말려서 결국 그는 구천에게 항복한다.

구천은 대인배의 자비를 베풀어, “네가 나를 살려준 것처럼 나도 너를 살려주겠다.”며 동쪽의 작은 섬을 준다.

중원의 패자에서 섬늙은이가 되버린 부차, 부끄러움에 자결을 결심한다.

그는 죽기 전에 얼굴을 천으로 가린다.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는 이유로...

 

* 뒷이야기

오자서의 시체자루가 강에 빠진 후, 그를 불쌍히 여긴 오나라 백성들은 강 옆에 사당을 짓고 '서산(胥山)'이라고 일컫는다.

현재도 남아있는 서산과 오자서 초상

한편 부차를 깨부순 구천은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 오나라 간신 백비를 처형하며, 범려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아 큰 벼슬과 재물을 약속하지만, 범려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蜚鳥盡, 良弓藏, 狡兎死, 走狗烹”

“새가 다 없어지면 활은 창고에 처박히고, 토끼를 잡고나면 사냥개는 보신탕이 되는 법이니...”

이것이 흔히 말하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원조이다.(유방과 한신보다도 먼저다.)

그는 구천의 신하이자 친구 문종에게도 튈 것을 권유했지만 권세가 아까운 그는 그러지 못했고,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어려움은 나눌 수 있어도, 즐거움은 나눌 수 없다”며 설득했던 범려의 제안을, 문종은 거절한다.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범려와 서시가 주로 연인관계로 그려진다.

그리고 뒷날 결국 문종은 구천에게 자결을 명받아 죽고 만다. 구천의 말을 듣지 않아 목숨을 잃은것.

야사에 의하면 범려는 서시와 함께 도주했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범려는 도(陶)나라로 가서 시세에 따라 물건을 사고 파니 금방 재벌이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473년 멸망한 오나라보다 늦은 170년 뒤, 월나라도 비슷하게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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