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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물'의 영광'

우리가 '독일'이라 부르는 나라는 18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 지역은 서로 작은 국가로 나뉘어 춘추전국시대 뺨치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17세기경, 독일 동쪽 지방에 호엔촐레른 가문이 지배하던 '프로이센'이라는 나라가 있었다.(프로이센은 독일어 발음이고, 프러시아는 영어 발음이다.)

이 당시 정치를 설명하자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사실상 오스트리아 제국의 꼭두각시와 같은 '체제'가 있었고 독일의 여러 제후들은 신성로마제국에 복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폴란드(이 당시는 강국이었다.)와 러시아의 위협을 줄이기 위한 완충지대로서 독일의 제후들을 이용했고 그들의 선거를 통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이센 지역은 그다지 살기에 쾌적한 동네가 아니었다. 게다가 동쪽으로 탁 트여서 침략도 자주 받았다.(영화 Gladiator 맨처음에 로마군이 싸우던 우중충한 동네가 바로 여기다.)

당장 원래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 게르만인들조차도 따뜻한 로마로 가겠다고 남쪽으로 민족대이동을 한 그 땅이다.

비 내리는 깡촌에서 밥먹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언제 동쪽에서 침략자들이 오나?' 감시하는 일이었던 호엔촐레른 가문은 중세 시대부터 알아주던 군인 가문이었다. 또한 선제후 가문(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투표권을 가진 가문)이기도 했다.

경제적 가치가 거의 없는 토지 때문에 오스트리아나 이태리의 간섭을 받지 않았고, 또 강력한 전투력을 갖고 있어서 독일 지역의 제후들은 서서히 머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에서 종교 개혁자이자 신교도자인 마르틴 루터를 죽이겠다고 하니까 선제후들이 "맨날 돈만 달라는 카톨릭! 루터는 우리가 보호할 것이다!"해서 루터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카톨릭에 맞서던 루터파의 가장 강력한 보호자들이 바로 이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657년, 프로이센의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브란덴부르크(오늘날의 베를린이 여기)의 선제후와 혼인으로 맺어진 일을 계기로 '이젠 종교도 다른 거 믿는데 오스트리아 눈치 보기 싫다. 나도 왕 한번 해보자!'하고 왕국을 세우고 왕을 칭했다. 이 사람이 프리드리히 1세이다. 프리드리히 1세는 프랑스에 대한 선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따라하기에 많은 투자를 했다.

프리드리히 1세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버지와 정반대였다. 그는 뼛속까지 군인이었다. 매우 검소한 인물이긴 했지만 수시로 군기를 잡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들겨패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부지런한 양반이라서 나라를 샅샅히 몸소 시찰하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랫사람들이 태만하다 싶으면 두들겨팼다. 일을 잘하면 앞으로 더 잘하라는 의미에서 두들겨팼다.

군사 훈련 이외에 아무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문화지원 사업을 다 중단시켜버렸다. 사냥을 싫어하고 산책을 좋아했는데 이유는 산책은 돈이 들지 않아서였다. 수시로 베를린을 산책하면서 길거리에서 노닥거리는 사람을 보면 그 자리에서 두들겨팼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지나치게 폭력적인 괴짜로 보이겠지만 사실 이 왕은 국민과 자기 병사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강한 군대를 만들었으면서도 전쟁만은 '국민들이 힘들어지므로' 일으키지 않았다. 본격적인 의무교육제도를 세계 최초로 실천한 사람도 이 사람이다. 그는 단지 병사를 징집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아이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국가가 돌봐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을 의무적으로 학교에 보내게 했고(그 과정에서 장차 군인으로 징집할 수 있는 남성 인구를 파악했다.)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돌봐주었다. 사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현재의 독일인에 대한 인식과 정반대로 키가 작고 뚱뚱한 체형이었다. 체격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그는 자기 군인들의 건장한 모습을 보면 매우 기뻐했고 취미도 행진과 사열이었다.

다만 프로이센은 자국민들의 병역 기피 문제가 심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외국인들도 군대에 받았다. 

재미있는 사실이지만 흡연실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이다. 그는 골초였으나 구두쇠였기에 홀로 새 담배를 태울 때마다 그게 너무 아까웠다. 궁리 끝에 신하들이 다같이 모여 담배를 피우면 연기의 양도 많아지고 오래오래 담배연기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래서 궁전에 흡연실을 만들어놓고 신하들을 불러 국정을 논의했다. 폭력적이었다는 것만 빼면 어진 왕이었다.

"짐에게 애정이 있기에 너희를 두들겨패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그리고 강력한 군대와 풍족한 재정과 절대왕권을 만들어놓고 아들 프리드리히 2세에게 물려주었다.

우리가 흔히 '프리드리히 대왕'이라 부르는 사람은 바로 프리드리히 2세다.  

현대 국가의 제도적 기초를 닦은 계몽 군주였다. 중세시대 제도의 개혁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본격적으로 사법제도에서의 고문(torture)의 사용을 금지한 군주이기도 하다. 물론 대왕 자신은 절대권력을 휘두른 절대왕정의 군주였지만 국민의 소중함을 언급한 인물로서 당대에 큰 존경을 받았다. 대왕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밀리고 있다가 평소 대왕을 흠모하던 표트르3세가 즉위하고서 러시아가 프로이센과 손을 잡아 오스트리아를 물리쳤다는 기적같은 이야기가 있다.

구두쇠였던 아버지와 달리 문화 사업에 많은 투자를 많이 했다. 게다가 대왕 자신도 학문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서유럽의 지식인들을 자주 초빙했다. 대왕은 군사강국일 뿐이었던 프로이센에 지금의 '독일 문화'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현재 독일이 예술과 과학 등에서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프리드리히 대왕 덕분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군사지도자였다. 프리드리히 1세는 8만 군대를 키워놓았지만 대왕은 19만을 육성했다. 아버지와의 차이점이라면 이 사람은 전쟁을 수시로 일으켰다는 점이다. 한때 전투에서 패배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전쟁에서는 승리하여 역사에는 승리자로 기록되었다. 워낙 드라마틱한 승리를 이룩한 사람이라서 후대에도 존경을 받았다.

아버지는 골초였지만 대왕은 담배를 매우 싫어했고 결국 흡연실을 폐쇄시켰다. 대신 대왕은 커피중독자였다. 아침에 6잔, 밤에는 주전자 하나, 이 정도로 커피를 마셨대고 한다. 그래서인지 눈이 퀭하다. 

프리드리히 대왕

뛰어난 군주들의 통치로 프로이센은 이제 동유럽의 용병집단(프로이센은 군사강국이라서 이 지역 출신들이 다른 나라에 군사전문가로 초빙되어 가는 일이 많았다.)에서 유럽의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영광은 서서히 빛이 바래지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통은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상명하복의 명령 체계였다. 프로이센 군인들은 상부의 퇴각 명령이 없으면 설령 총탄에 맞아죽는다 해도 후퇴하지 않는 강한 기강으로 유명했다.

요즘 모든 군대에서 실시하는 구보와 행진도 프로이센에서 처음 시작된 훈련이었다. 발을 맞추어 걷다 보면 개성은 사라지고 조직의 한 부품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이센 군대의 강점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개인적 재능에 의지한 바가 컸다. 사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소년 시절에 유럽에 실존하는 모든 군사교본을 다 읽었을 정도의 인물이었고 현장에서 군대를 몸소 지휘하는 뛰어난 군사지도자였다.

하지만 대왕의 후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애정의 매'를 실천했던 프리드리히1세의 전통은 시간이 지나면서 병사들에 대한 복지는 사라지고 매질이라는 형태만 남게 되었다. 프로이센 군대는 여전히 기강을 잡는 수단으로 매질에 의존했는데, 이는 병사들의 군에 대한 충성심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위대한 인물'이 이룩한 업적에만 취해 있었던 프로이센 내부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누적되고 있었다.

'위대하지 않은 나라'의 굴욕

1701~1713년 : 프리드리히 1세

1713~1740년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1740~1786년 : 프리드리히 2세(대왕)

1786~1797년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19세기초, 유럽은 희대의 천재를 목격하게 된다. 바로 프랑스의 실력자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을 두려워한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3국동맹을 맺었다.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직접 군대를 몰아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 맞붙었다. 그리고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둔다.

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알렉산더 대왕의 가우가멜라 전투,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와 더불어 서양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 능력이 발휘된 전투로 불리우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이 한번의 전투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은 역사 너머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무너지자 이번에는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경계하게 되었다. 더구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영향으로 서양의 계몽사상이 많이 유입되면서 양성된 독일의 지식인들은 모두 나폴레옹이 자유와 인권 등의 가치를 침해한다고 보았다. 프로이센 전체에 반 나폴레옹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완충지대를 만들려고 '민족 자결론'을 내세우며 게르만 민족이 아닌 나라들은 독립하라고 부추긴 것처럼, 실은 나폴레옹이 먼저 했던 구상이다. 당시는 '독일'이라는 개념이 아직 없었을 때니까 나폴레옹으로서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견제할 완충지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프로이센에 반대하는 친 프랑스 성향의 제후들을 모아 '라인 동맹'을 건설하게 했다. 

당시의 국왕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였다.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문약한 인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하지만 그는 우유부단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현실 감각이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반기를 든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이센을 휩쓸었던 반 프랑스 감정은 갈수록 고조되었고 심지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가족들마저도 나폴레옹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사강국의 후예들이라는 자존심이 눈을 멀게 만들었을까?

아우스터리츠에서 나폴레옹이 무려 2만명을 물리친 것이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치솟아가는 반 프랑스 여론에 굴복했다. 그리고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게 라인 연방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선전 포고였다.

당시 프로이센에서는 우유부단하다고 욕먹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대신 프랑스에 대놓고 강력히 반대했던 루이제 왕비가 더 큰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국내 인기 때문에 바뀌는 외교는 없다.

루이제 왕비

1806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의 전면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군대를 문자 그대로 '학살'했다. 프랑스군의 힘을 알기 위해서는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군이 실시한 개혁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당시의 프랑스군은 기강을 잡기 위한 매질을 금지시키고, 정신교육의 중요성을 도입한 최초의 군대이다. 프랑스 군인들은 '프랑스인이며 프랑스를 위해 싸운다.'는 사상을 배우고나서 전투에 투입되었다.

즉, 용병을 포기하고, 외국인이 군대에 들어가는 일을 금지하여, 오로지 국민만으로 군대를 만드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외국인이나 용병으로 이루어진 군대와 달리 국민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전투 도중에 도망갈 확률이 크게 낮아진다.(프로이센이 왕의 명령없이 후퇴하는 일을 금지한 이유는 이탈과 탈영을 막기 위해서였다.)

사상교육을 통해 프랑스군은 전술의 폭이 크게 넓어졌다.

둘째로, 프랑스군은 다양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군단'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기존의 군대는 지휘관 밑에 기병, 포병, 보병, 병참이 따로 존재했다. 그러나 군단에는 전속 기병대, 포병대, 보병대, 병참부대가 전부 딸려있었다. 군단을 지휘하는 육군 원수들은 나폴레옹의 지휘를 받지만 나폴레옹이 직접 명령한 것이 아니라면 개인의 재량으로 판단하는 것이 가능했다. 원수 밑에는 각각 사단장들이 있어서 나폴레옹의 직접 명령을 받지 않고도 부대의 출동이 가능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각 군단의 연락망(연락망이라고 해도 이 때에는 전령을 보내는 게 전부)을 대폭 확장했다.

하도 전령이 수시로 왔다갔다 해서 나폴레옹의 명령을 하나하나 받기가 힘들었던 원수들은 아예 전령이 따라오지 못하게 진격 속도를 늘리는 일도 있었다. 어쨌거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강력한 수직적 명령체계를 대신할 새로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아우어슈테트 전투는 프로이센의 수직적 명령체계의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했다. 군단제가 없던 프로이센군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진격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부하 루이 니콜라 다부가 이끄는 제 3군단과 마주쳤고, 전투를 벌였다. 숫자는 프로이센군이 2배 이상 많았다. 하지만 다부의 사단장들은 흩어졌다 반격하는 끈질긴 전투로 프로이센 군대의 진을 빼놓았다. 그리고 전투 도중에 프로이센군의 총지휘를 맡았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군사 지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이 중상을 입는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후방으로 옮겨졌지만 브라운슈바이크는 곧 사망했다.

상부로부터 명령을 받지 못하게 된 프로이센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다부의 제 3군단은 움직이지 못하는 거인이 된 프로이센군을 마구 학살해댔다. 로마제국 이후의 유럽에서 2배 이상의 병력을 상대하여 승리한 일은 유례가 없다. 게다가 다부의 제 3군단은 비록 7,000명의 손실을 겪었지만 그 2배에 달하는 14,000명을 죽였다. 이런 거대한 승리는 나폴레옹조차도 거두지 못한 것이다.

아우스터리츠의 승리 이래로 자신감이 넘치던 나폴레옹은 다부 원수의 아우어슈테트 전투의 보고를 받자 깜짝 놀라면서 "그게 말이 되나. 다부 원수는 물체가 두배로 보이는 거 아니냐?(실제로 다부는 심한 근시였음.)"고 반문했다는 일화도 있다.(나폴레옹이 다부를 질투하여 워털루 전투에서는 일부러 다부를 데려가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루이 니콜라 다부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장군이었고 최연소 육군원수에 오른 루이 니콜라 다부.(탈모가 심해서 20대 때 저런 머리가 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프로이센군의 지휘를 맡았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아우어슈테트 전투의 궤멸적인 패배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영광에 취해 있던 프로이센의 단꿈은 끝났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이 여색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 부인 루이제를 평화 사절로 보냈다.

나폴레옹이 루이제를 건드려도 프로이센에게 유리한 조건을 얻어낼 수 있다면 견딜 각오였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부인의 미모에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진 남자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루이제 왕비는 1776년생으로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이 진주했을 때에는 이미 31세였다. 게다가 애도 이미 7명이나 출산한 후였다. 나폴레옹은 루이제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폴레옹은 미인계에 약할 거라던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프로이센에게서 모든것을 탈탈 털어버린다. 틸지트 조약(Treaties of Tilsit)을 체결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금까지 프로이센이 점령했던 폴란드의 영토를 빼앗는다는 점이었다. 나폴레옹은 그 영토를 친 프랑스계 폴란드인들에게 떼어주고 사실상의 괴뢰국인 뱌르샤바 공국을 만들었다.

실은 마리아 발레프스카도 프랑스의 힘을 빌려 프로이센과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자는 폴란드의 귀족가문 출신 여성이었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진하여 나폴레옹의 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나폴레옹은 마리아보다 더 어린 '마리 루이즈'라는 오스트리아 황녀와 결혼하기 위해 마리아를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끝까지 나폴레옹을 충성 및 사랑했고 심지어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갈 때에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영국군에 의해 거절당했다.

마리아 발레프스카

틸지트 조약에서 러시아는 프로이센의 배신하고, 일방적으로 나폴레옹의 편을 든다.

러시아 믿고 나폴레옹과 싸운 건데 러시아의 배신에 프로이센인들은 절망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프로이센에서는 프랑스도 러시아도 믿지 말자, 프리드리히 대왕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민족주의가 커졌다.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애국자들에 의해 나폴레옹도 암살 위협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근위대의 호위를 받는 나폴레옹을 암살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설령 나폴레옹을 암살한다 해도 모든게 박살난 프로이센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절망에 빠진 프로이센 지식인들은 희망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도 바로 이 당시의 프로이센인이었다. 조국의 상황에 절망하여 자포자기 하는 동포들을 바라본 괴테는 자신의 단편소설 '파우스트'를 개정하여 연극용 희곡으로 고쳐쓴다. 1808년에 출판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파우스트이다. 원작 파우스트와 달리 괴테의 파우스트는 해피엔딩이라는 점이 큰 차이이다.

파우스트의 주제는 '지성이면 감천이다.'를 한단계 더 발전시켜서, "인간의 간절한 마음은 신까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분명 현실도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현실에서 도피할 수 밖에 없다면 절망보다는 희망이 낫다는 게 또한 괴테의 생각이었다. 

괴테는 군대에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부관으로 전쟁터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폴레옹 군대의 괴력 앞에서 브라운슈바이크는 전사했고, 괴테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믿었던 모든 과거의 영광은 현실 앞에 사라졌다. 그런 상황에서 괴테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억지로라도 희망을 갖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한편 비참한 현실에서도 재건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프로이센인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인물은 우유부단한 인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였다.

온나라가 실의에 빠졌을 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놀라운 정치력을 보여준다. 우선 그는 나폴레옹 앞에서 아부를 하며 프랑스에게 덤비지 않겠다는 자세를 거듭 보였다. 이 점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무능하다고 깎아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나름대로 개혁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게르하르트 요한 샤른호르스트(Gerhard Johann Scharnhorst)를 스카웃한 일이다.

게르하르트 요한 샤른호르스트(Gerhard Johann Scharnhorst)

샤른호르스트는 이미 상당히 유명한 군사이론가였다. 그는 프로이센 출신이 아니라 하노버 출신이다. 하노버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투신해 참모로 활동하는 한편 다른 나라의 군대를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해왔다. 그의 연구는 프로이센에서도 상당히 자주 읽혔고 이 과정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샤른호르스트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1801년, 샤른호르스트에게 대령 자리를 주면서 스카웃해왔다. 

하지만 당시의 프로이센 군대의 주요 자리는 프로이센 귀족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외국인 출신의 샤른호르스트가 끼어들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적었다. 하지만 샤른호르스트는 좌절하지 않고 당시 점차로 세력이 커져가고 있던 프랑스군에 대해 연구를 계속했다.

아우어슈테트 전투 당시, 샤른호르스트는 아우어슈테트가 아닌 예나(Jena) 지역에서 나폴레옹군과 맞서 싸웠다.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프로이센 주력군이 전면항복하면서 샤른호르스트도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일로 샤른호르스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프랑스군의 힘에 대해 알고 싶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샤른호르스트의 논문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샤른호르스트의 식견에 탄복한 왕은 1807년, 하노버 출신의 '외국인'에게 프로이센군을 개혁할 방안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샤른호르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저의 계책을 받아들이시겠다면 먼저 저를 귀족으로 만들어주시고 참모총장의 자리를 주십시오."

마치 환공의 스카웃 제의를 받자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다스릴 수 없고 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명령할 수 없는 법이니 먼저 저에게 많은 돈과 높은 지위를 주십시오."고 말한 관중과도 같았다. 당돌한 요구였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그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가 우유부단한 겉모습의 이면에 얼마나 프로이센 재건을 위해 절치부심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샤른호르스트의 이름에는 귀족을 나타내는 폰(von)이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참모총장으로 샤른호르스트는 이제 프로이센의 군 지휘관들에게 직접 호통을 칠 수 있는 지위에 올랐다.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의 개혁안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식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프랑스 방식을 따르기에는 프로이센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고 반발하는 귀족들이 있었지만 샤른호르스트에 의해 묵살되었다. 프로이센 군대에서 상급자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프로이센의 귀족 작위를 받음으로서 프로이센 국민이 된 샤른호르스트는 군대에서 용병과 외국인을 모두 몰아냈다. "위기의 순간에 도망가지 않고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국민들만이 군인이 될 자격이 있다."는 논리에서였다. 

그리고, 융통성이라는 전혀 없던 프로이센의 명령체계를 개혁하기 위해 'mission command' 즉 임무 지휘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맡긴다는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되어있는 원칙이지만 당시의 19세기, 특히 상명하복만이 절대적이던 프로이센에서는 혁명과도 같았다.

프로이센군은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한 향수 때문에 '용맹함과 불굴의 의지, 지략을 모두 갖춘 완벽한 군인'에 대한 환상이 강했다. 하지만 샤른호르스트는 이제부터는 참모의 시대가 온다고 내다보았다. 전쟁에 필요한 능력은 용맹한 군인이 아니라 똑똑한 군인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똑한 군인은 일부 천재의 재능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우수한 참모진을 육성하고자 했다. 이것이 샤른호르스트의 목표인 '한 명의 천재가 주도하는 게 아닌 여러 명의 수재들이 이끄는' 군대였다. 

샤른호르스트의 개혁은 나폴레옹에게 당한 교훈을 절대로 잊지 않았으며 두번 다시 아우어슈테트에서의 참패를 당하지 않겠다는 절치부심의 노력이었다. 샤른호르스트는 왜 프로이센군이 나폴레옹에게 속수무책으로 항복하게 되었는지를 연구했고 그 결과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격 의지를 꺾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나중에 독일의 대명사가 되는 전격전 및 거의 모든 현대 군대의 전략적 기초를 제공했다. 좀더 설명하자면, 나폴레옹은 아우어슈테트에서의 압승 직후 군대를 프로이센 전역에 파견하여 프로이센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나중에는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의 모습만 봐도 항복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 교훈을 잊지 않았던 샤른호르스트는 지속적인 공격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그 효과는 훗날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헬무트 폰 몰트케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1870년 프랑스군을 단숨에 꺾고 국왕 나폴레옹 3세로부터 항복을 받아냄으로서 증명되었다. 

샤른호르스트는 전쟁론을 집필한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스승이기도 했다. 샤른호르스트라는 희대의 이론가를 발굴해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업적은 단지 그가 뛰어난 군사지도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과소평가되어선 안된다.

빨간바지 입은 사람이 나폴레옹 3세. 흰색 군복 입은 사람이 비스마르크. 나폴레옹3세와 비스마르크 사이에 있는 화려한 턱수염이 프로이센 왕 빌헬름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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