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아프리카에서 안정된 국가중 하나, 보츠와나
아프리카 대륙 중에서 보츠와나는 그나마 경제적,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중 하나이다.
보츠와나는 아프리카 남쪽에 있는 내륙 국가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 중 하나였다.
사실, 보츠와나에는 금의 매장량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독일이나 영국같은 서양 열강들 뿐아니라, 주변 아프리카 이웃 국가들 역시 군침을 흘리며 욕심을 내던 국가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보츠와나의 금의 매장량을 보고 병합을 제안하기도 했고,
영국과 보츠와나의 츠와나족은 당연히 단칼에 거절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1860년 무렵, 보츠와나의 타타 강 인근에서 대규모 탄광이 발견되었고 금 역시 많이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서, 트랜스발 공화국(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옛 이름)은 병합 요구를 했지만 당연히 영국과 보츠와나의 구성원인 츠와나족에 의해 거절당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여기서 영국이 개입한 걸까?
영국은 일찍부터 성공회, 즉 지금 영국의 국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1813년에 보츠와나로 들어왔다. 그러면서 영국은 이 보츠와나에서 뿌리박혀 한 구성원으로써 생활하는데, 보츠와나도 이들에게 호의적이었다.
딱히 문제될 게 없었는데, 이들은 "전쟁" 목적이 아닌 순수한 "종교 전파" 가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이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네덜란드인의 침입 등을 보츠와나와 함께 물리쳐내기도 했다.
그러던 도중, 타티 강에서 대량의 금이 발견되었고 이것을 안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영국의 대립이 있었지만,
1881년에 실질적인 행정 업무를 맡는 수도, 프리토리아에서 협정을 맺음에 따라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보츠와나의 국경을 명확하게 구분짓게 된다.
물론 이들 중, 이 협정을 반대하고 서양 열강 세력을 몰아내자는 주장을 한 사람들끼리 뭉쳐서 두 개의 작은 공화국을 몰래 세운 뒤 영국군을 몰아내자는 주장도 펼쳤지만 영국에게 발각되어 1년도 못가서 무산된다.
그 후, 보츠와나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1960년까지 영국의 보호령 아래에서 베추아날란드라는 이름 아래에 있다가 차후, 1966년에 보츠와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 보츠와나는 영국의 보호령 아래에서 베추아날란드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무력 충돌도 별로 없었으며, 사이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래서 식민지 당시 서양의 민주 제도를 굉장히 많이 도입했는데, 대표적으로 식민지 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경제, 외교 등을 처리하기 위해 보호국이나 식민국에 보내는 관리인 판무관을 통해 정치를 하는 판무관 제도를 폐지하고 행정, 입법, 사법에 대해 영국과 비슷한 민주적 절차와 위원회를 도입했다.
또한, 1965년에는 헌법에 의한 최초의 총선거가 진행되서 민주당이 총 31개 의석 중 28개를 차지했다.
그 후, 일 년 뒤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마자 UN의 회원국이 되었다.
물론, 남아프리카 공화국보단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에 1970년대에는 남아공에 의존한 채 경제 성장을 주도 했고, 동시에 외교 관계를 철저히 하기 위해 잠비아와 보츠와나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역시 만드는 등 주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도 탄탄히 했다.
보츠와나의 이러한 성장과 발전은 보츠와나의 지도자들 공이 매우 크다.
먼저 보츠와나의 초대 대통령인 세레체 카마는 식민지 시절에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인과 결혼해서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다.
영국에 유학도 다녀오고, 영국 현지인들도 많이 만나면서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접한다. 참고로 세레체 카마는 보츠와나의 왕족이었고, 부인은 일개 은행원에 불과했었기 때문에 부족원들은 "영국인 만날꺼면 왕족 포기해라!" 라는 말을 듣고 영국으로 쫓겨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 후 부족원들 눈치 슬금슬금 보면서 왕족을 포기한 세레체 카마는 평범한 사람으로 부인과 함께 보츠와나로 귀국했어.
보츠와나로 귀국하자마자 그는 독립운동을 진행하였고, 1962년에 의회 의원이 됨에 따라 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그리고 나서 1966년 9월에 보츠와나는 드디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는데,
독립한 보츠와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곤에 허덕인 알거지 국가였다.
국민들은 대부분 떠돌이 부랑자 생활을 했고, 남아공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으며 정부는 이미 독립했지만 영국에 의존하면서 정치와 경제, 외교를 꾸려나갔다.
하지만, 1967년,
보츠와나에서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이 되었는데 이 규모가 역대급이었다.
즈와넹 광산이라고 불리는 이 광산에는 한 해 동안 평균적으로 채굴되는 다이아몬드만해도 1천 350만 캐럿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 광산을 통해서 1년동안 약 600~800억 정도를 벌어들일 수 있다는 거였다.
지금까지도 이 광산을 채굴하고 있으니 매장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라고 알 수 있다.
지금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민간 기업과 함께 채굴을 하고 있는데, 그 깊이와 크기가 너무 커서 직접적으로 채굴은 하지 못하고 주변 노천을 이용해서 하고 있다.
이러한 다이아몬드 광산의 발견으로 초대 대통령 세레체 카마는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벌어들인 수익금을 교육, 의료, 시설물 등 내부 인프라에 집중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67년부터 1980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주도하고 이룩했다.
남아공처럼 부정부패로 인한 비리가 심심찮게 일어나는 내전으로 몸살을 앓는 국가들에서 이러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었다면 분명 분쟁이 심했겠지만, 아마도 대통령의 자질이나 마인드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발생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보츠와나가 처음부터 깨끗하고 청렴했던 나라는 아니었다.
1990년대 초반, 보츠와나의 공무원들이 뇌물을 받아 이권을 챙기고, 지역개발 사업에 특혜를 주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는데 이 수준이 정말 심각할 정도로 커졌다.
그래서 정부는 국가의 위기를 느끼고, 이에 따라 1994년부터 부패와 경제사범에 대해 엄벌 할 것을 예고한다.
실제로 DCEC라고 불리는 부패 및 경제 범죄원을 관리하고 감시하는 기구를 세워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렇게 잘 진정되나 싶었는데 20년이 지나고 사건 하나가 더 터진다.
친척이 운영하는 업체에 특혜를 부과했다는 의혹을 받은 라마델루카 세레체 국방부 장관이 부패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여러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자 부패사건만을 전담하는 법원을 설립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 등으로 세계 부패청렴 순위에서 보츠와나는 아프리카 국가 치고 꽤 높은 랭킹에 위치해서 31위에 안착했다.
더군다나 아프리카에서 가장 투자매력이 높은 나라로 보츠와나가 모로코와 큰 격차로 1위를 차지했다.
아마 치안과 부패, 내전, 전쟁등의 위험적 요인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미국 유망 투자기관에서도 투자적합도 1위도 받아내고 세계에서 아프리카 치고 인식이 꽤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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