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타이완(대만)이 어떻게 중국땅이 되었을까?
물론 타이완은 현재 중국땅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 네덜란드령이었다가 청나라령으로 넘어갔고, 그 사이에 재미있는 역사가 있다.
때는 17세기초 일본 히라도, 남의 옷을 수선해주며 풀칠하는 중국인이 있었다.
하루는 남의 옷을 수선해 3냥의 동전을 받아 싱글벙글하며 집에 돌아갔지만, 수선해서 받은 3냥 모두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잃어버린 돈을 찾기위해 거리를 모두 살폈지만 결국 돈을 찾지 못하자 중국인은 울음을 터트리고 그런 중국인을 딱하게 보는 일본인이 자초지종을 듣고 말하길 "당신의 재주는 300만냥을 벌수도 있을건데 겨우 3냥에 연연하는지요?"
그 일본인은 하라도의 하급 무사의 딸인 "타가와 마츠"였고 중국인은 동아시아의 해적왕이 된 "정지룡"이었다. 정지룡은 그 일본인과 결혼하여 중국으로 떠나고 정지룡과 타가와 마츠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니 그가 바로 "정성공"이다.
타이완 전설에 따르면 정성공이 태어날 때 거대한 태풍이 일고 고래가 춤추고 있었다고 마쓰의 태몽은 고래가 자신의 품속에 뛰어드는 것이었다고 한다.(고래는 정성공의 수호동물이다.)
정지룡이 일본에 있을 무렵엔 대상인이던 "이단"의 상단원이었지만 이단이 죽자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동아시아의 해적왕이 되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아들이 생각난 정지룡은 7살밖에 안된 정성공을 데려오고 무술과 유교경전을 가르쳤다.
또한, 일찌감치 정성공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이름을 대목(大木)으로 짓거나 마카오에서 사들인 포르투갈 흑인 노예들로 호위를 맞기는등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어릴때 받았던 조기교육은 정성공이 북벌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계기가된다.
정성공이 중국에 올 무렵 동아시아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명나라는 종이 호랑이가 되었고, 야만족이라고만 생각하던 여진족이 청나라를 건국 조선을 침략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명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태평성대라면 해적이던 정지룡은 참수되 저잣거리에 목이 나뒹굴어야 정상이겠지만 해적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명나라는 정지룡에게 적당한 관직을 주고 각지의 반군을 토벌하라는 임무까지 준 상태였다.
어린 정성공은 아버지인 정지룡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포르모사(타이완) 총독이던 푸트머스를 상대로 대승리를 거둔 이야기, 각지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이야기,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에게 충성을 바쳤다는 이야기 등을 들으며 자랐고 아버지를 유능한 수군제독이자 명나라 충신으로 알고 자랐다.
정성공의 어릴때 일화 하나를 소개하자면 15살이 되자 남경의 교육기관에 입학하러 가던 도중 점쟁이에게 점을 치게 했는데 점쟁이는 "이 아이는 커서 영웅이 될 것입니다. 다만 벽돌로 지은 성에서 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훗날 타이완의 프로빈샤 요새를 점령한 정성공은 현지 주민들이 "이 성은 외국에서 온 자재로 지어져서 벽돌로 지은 성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정성공은 "운명의 굴래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인가."라고 읆조렷다고 전해진다.
안타깝게도 숭정제는 명나라의 다른 암군들에 비해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태어나 자살하게 된다. 숭정제가 죽을때 이자성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었고, 그의 마지막을 지키는 사람은 겨우 환관 1명 뿐 이었다고한다.
정성공이 유교 경전과 씨름하고 있을 무렵 명나라는 이자성에게 멸망했고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자살하고,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최후의 군대를 지휘하던 오삼계는 만주족에게 항복한다.
산해관을 넘어온 만주족은 이자성을 물리치고 명나라 잔당은 남경에 남명정권을 수립했다.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이 몰려오자 해적 출신으로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빠삭한 정지룡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오랑캐라고 천시하던 청나라 만주족에게 항복할까? 아니면 남명 정권에 끝까지 충성을 다 할까? 정지룡이 선택한건 청나라와 손을 잡는것이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손을 잡는것도 아닌게 겉으로는 남명정권을 지지햇으며 군자금은 물론 병력까지 파견한 상태였다.
즉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한 것이다. 문제는 정지룡 같은 기회주의적 선택을 한게 한두명이 아니란 것이었다. 명나라는 중국을 통일하고 200년가까이 통치했지만 무능한 황제들과 무능한 통치로 백성들에게 버림 받은지 오래였고 이들이 겉으로나마 명나라를 지지한것은 후에 중국을 통일하게될 만주족 청나라를 상대로 자신들의 몸값을 올리려고 한 선택이었다.
남경을 수도로 청나라에 저항하려한 남명정권은 무려 20만 대군을 동원했지만 이들 대다수가 기회주의자들이었고 청나라 군대가 다가오자 이들과 내통해 남명 정권은 남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할 수 밖에 없었다.
강력한 기병을 가진 만주족 청나라에게 남명 정권은 계속 패배하고 남쪽으로 도망갔고 남명과 청나라를 상대로 간보기를 계속하던 정지룡은 청나라로 입조해 충성을 바치기로 결정한다. 정지룡이 북경으로 떠나고 정씨가문을 책임진 정성공은 청나라와 계속 싸우기로 결정한다. 정성공이 보기엔 그가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야만족 청나라가 아닌 한족인 명나라였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급해진건 아버지 정지룡이었다. 청나라에게 항복하기로 하고 입조까지 했는데 아들이 청나라와 싸운다고 하니 급히 편지를 보내 "너는 애비가 험한 꼴을 당하는 걸 보고 싶느냐?" 청나라에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냈고 이에 대한 정성공의 답장도 걸작인데 "나라에 보답한다."였다.
결국 정지룡은 참수당한다.
이에 남명 정권의 융무제는 성공을 거두라는 의미로 "성공"이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황실 성인 주씨를 써도 된다고 해서 나라이름을 쓴다는 뜻의 국성야((國姓爺)라고도 불리게 된다. 후에 정성공이 네덜란드를 공격하자 국성야는 서양으로도 퍼져 "콕싱가"라고 불리게 되었다.
정성공이 속한 정씨가문은 해적과 밀수,밀매가 주업종이었다. 아버지인 정지룡이 명나라 관직을 받으면서 해적질을 관뒀다고 하지만,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 청나라와 싸울 군자금을 모집하기 힘들자 내린 선택이었다.
해적질과 밀수 밀매로 군자금을 긁어 모은 정성공은 마침내 1658년 5월 3백척의 대함대와 20만대군을 이끌고 북벌에 나선다.
어릴때 정성공은 보병 중심의 일본 사무라이들을 보고 자랐고, 말이 부족한 남중국에서는 만주족의 기병에 대항할 말이 없었다.
그에 따라, 일본식 갑옷을 채용한 군대를 철갑병들은 저 갑옷을 입고 들판을 3회 이상 왕복할 수 있는 병사로 구성됐고 은 3냥을 받아 급료도 높았다고한다.
이들 철갑병들은 참마도를 들고 청나라 기병이 가까이 올때까지 대기했다가 칼을 휘둘러 말다리를 잘라 기병이 강한 청나라 군대와 싸웠다고 하는데 후에 철갑군과 싸운 네덜란드인들의 기록을 보면 "콕싱야의 군대는 3가지로 구성돼었다. 등에 활과 화살을 짊어진 병사와 검과 방패를 든 병사 무거운 비늘갑옷과 거대한 칼을 휴대한 병사로 이들은 방패로 몸을 보호하고 목숨이 두개라도 있는것처럼 돌격과 후퇴를 반복한다. 심지어 다수가 죽었음에도 미친개처럼 우리에게 달려든다."
1658년 7월 양자강 입구인 항주 인근의 주산을 점령했으며 8월에는 양산을 점령햇으나 양산에서 태풍을 만나 3백척의 전함 중 100여척이 침몰했지만 그대로 남경까지 돌파해 1659년 7월에 남경 성문까지 육박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성공의 운도 여기서 끝이었다. 청나라 군대를 만나면 이기고 성을 포위하면 점령하니 자만심에 빠진 정성공은 남경 성문 아래에서 청나라 군대의 함정에 빠져 군대를 잃고 겨우 도망쳤다.
20만대군을 이끌었지만 처참한 실패에 정성공에게 남은건 하문 한 곳 밖에 없었다.
20만 대군을 날려버진 처참한 실패에 시름시름 앓던 정성공에게 어느날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달 받았다. "타이완은 옥야천리로 가히 왕업을 이룰만하니 출병해서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해 주십시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중국어 통역관이었던 하빈은 해고당하자 앙심을 품고 정성공에게 청원한것인데, 이에 정성공은 350척의 선박과 2만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타이완으로 향했다.
사실 정성공은 이전부터 타이완에 눈독들이고 있었다. 1625년 중국인 노동자들이 네덜란드 당국의 처우에 항의하자 네덜란드는 8천 명의 중국인을 죽이고 정성공이 항의한 일도 있었으며 네덜란드 포르모사 총독부도 정성공 북벌 전부터 "우리는 만주족에게 수차례 패배한 정성공에 대해 불안감을 떨칠수가 없습니다. 그는 필시 패배하고 안전한곳을 찾을텐데 타이완이 그 목적지가 될 것 입니다. 정성공의 부대는 군율이 엄격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부하들은 점점 이탈하고 있고 후에 그들이 타이완을 침략할 때 그 수가 줄어들기를 희망할 뿐 입니다." 조심하자고 경고한 상태였다.
네덜란드 측은 중국과 교역시 정성공을 통해 교역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침략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거점을 요새화한 상태였다.
네덜란드 측도 이에 대비해 12척의 범선과 6백명의 병력을 지원했다.
당시 네덜란드 측 상황은 총독인 프레데릭 코예트와 수비대장 판 데르 얀이 임진왜란을 앞두고 조선 동인과 서인이 싸운 것처럼 침략한다, 안한다로 다투고 있었다.
결국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염탐하게 한 것처럼 네덜란드도 사신을 보내 정성공을 염탐하는데 정성공은 2차 북벌을 시작한다는 속임수에 완벽히 넘어가고 방심했다.
정성공이 침략 안한다는 보고를 받은 판 데르 얀은 오히려 포르투갈령 마카오 공격준비를 할 정도였고 마침내 정성공이 대만을 침략하자 아무런 준비도 못햇던 프로빈티아 요새는 처절하게 싸웠으나, 프랑스 용병의 배신으로 항복했고 포로로 잡힌 네덜란드 인들은 눈과 코와 손이 잘린 채로 돌려 보내졌고 질란디야 요새만 남은 상황이었다.
총독인 코예트는 질란디아 요새에 혹시 모를 침략에 대비해 3만 파운드의 화약과 6개월치 식량을 비축한 상태였다.
한편 정성공은 포로로 잡힌 네델란드인들을 질란디아 요새로 보내 항복을 종용했고, 그들 중에는 부녀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제란디아 요새는 항복을 거부했고 분노한 정성공은 부녀자들을 부하들에게 노예로 넘겨줬다. 이때 정성공도 수십명의 네덜란드 백마를 첩으로 거둔다.
수개월 간 코예트는 버텼고 2차례 구원군이 왔으나 1차는 구원군이 아니라 정성공의 침략이 없는데도 침략이 있다고 유언비어를 조장해 군비를 올리는 코예트를 해임하려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어이없는 선박이었고, 2차는 10척의 선박과 600명의 지원군이 왔지만 모두 다 해상격퇴 당하고 독일인 용병들이 탈영해 정성공에게 항복하자 제란디아 요새는 결국 항복한다,
항복하지 말라고 울부짓는 총독의 두딸, 항복하면 부녀자들은 당시 전쟁상 험한꼴을 당하기 쉬웠다.
결국 네덜란드는 항복하고 정성공은 타이완을 점령한다.
한편 정성공은 죽기전 필리핀 원정을 계획했는데, 필리핀의 스페인 사람들에게 "네덜란드 인들이 나에게 부끄러움도 없이 제멋대로 굴었다. 그자들이 좀더 공손했다면 나도 이러진 않았을거다. 듣건데 너희 소왕국 놈들도 불쾌감을 주는데 조공하면 넘어가 주겠다."라는 오만한 답신을 스페인에게 보낸다.
이에 스페인도 "스페인 사람들과 한판 붙고 싶다면 언제든지 붙어줄게. 그동안 니들이 상대해온 만주족이나 네덜란드하고는 다를거다. 그리고 여기까진 올수나 있냐?" 역시 오만한 답신을 보내 한번 충돌하는가 싶었지만, 정성공이 죽어서 정성공과 스페인 매치는 물건너간다.
정성공이 죽고나서 정씨가문은 타이완의 지배자리를 놓고 내분을 벌였고 청나라에 반대하는 삼번의난이 터지자 삼번을 지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삼번을 공격해 작은 이득을 보는데 만족했고 결국 강희제가 보낸 수군에 항복한다.
이때 수군제독이 시랑이였는데 시랑은 정씨가문 휘하에서 수군운영을 배운 사람이었다.
이렇게 타이완은 청나라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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