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그루지아가 조지아가 된 이유
미국 조지아주가 아니다.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나라이다.
조지아의 옛 이름은 그루지아였다. 스탈린이 바로 그루지아 출신이다.
그루지아가 조지아가 된 내막을 설명하자면 먼저 한국 사람들이 남달리 존경하는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국인들이 윌슨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기 때문이다.
즉, 민족들끼리 알아서 살아야지 다른 민족이 점령하면 안된다는 소리이다.
한국이야 단일민족이니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중요한 사상적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울 때 그것은 한민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미국에게 껄끄러운 존재였던 투르크 제국이나 소비에트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완충 지대를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당시 미국이나 미국의 우방들이 갖고 있던 식민지까지도 포기해야 한다는 소리로 확대될 수 있었다.
결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윌슨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히틀러 같은 인물이 등장하면 민족자결은 커녕 민족 청소가 일어났으니 윌슨의 이상은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세월은 흘러 1991년, 결국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의 공산권이 무너졌다.
소련이 동유럽을 지배하던 바르샤바 조약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러자 소련이 동유럽 지배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만든 위성국가들이 점차 분열하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도 그 중 하나였다.
본래 여러 민족들이 섞여서 살고 있었던 이 지역에 나치 독일에 맞서 독립 투쟁을 벌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통치력을 발휘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유지해왔다.
티토는 소련의 꼭두각시 역할을 거부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로 유고슬라비아 국내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티토가 세상을 떠나자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민족들을 다잡을 구심점이 사라졌다.
유고슬라비아는 오랜 내전을 겪은 끝에 결국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구 유고슬라비아 공화국령 마케도니아(마케도니아라는 국호를 그리스가 반대했다.)로 분열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세르비아 영토 내에 있던 코소보였다.
세르비아인들과 달리 코소보인들은 대부분 알바니아인들이었다.
코소보인들은 세르비아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알바니아에 편입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것은 세르비아가 펄쩍 뛰며 반대했다. 게다가 국제법상으로도 코소보의 알바니아 합병은 금지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Uti Possidetis(우티 포시덴티스) 원칙 때문이다. 따로 양국이 영토에 대해 합의한 게 아니면 기존의 국경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다. 즉, 코소보 지역을 합병하여 알바니아의 영토가 커지면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다.
우티 포시덴티스 원칙이 중요해진 이유는 바로 히틀러가 동유럽을 야금야금 점령해가던 수법이 바로 "저 지역에는 독일계가 많으니까 독일과 합병해야 한다."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역이 독일계가 많다고 합병할 때,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대표는 뮌헨에서 히틀러와 만나 회담을 가졌다. 이때 영국의 총리가 체임벌린이었다.
아무튼 코소보인들의 세르비아 정부에 대한 저항은 거세져갔지만 세르비아는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코소보인들은 어떻게 했을까? 1999년부터 세르비아 상대로 테러 행위를 벌였다. 이에 세르비아 정부는 코소보에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였다.
그런데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이 누구였을까?
바로 발칸반도의 도살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였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밀로셰비치는 코소보에서 인종청소를 벌였다.
이미 그 전에 유고 내전과 보스니아 내전에서 인종청소가 발생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세계최강대국 미국이 가만 있으면 안된다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바로 빌 클린턴이었다.
미국의 힘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레이건 이후 미국의 외교는 인권이나 자유를 지킨다는 신 윌슨주의로 갈아타게 된다.
그리고 이 사진에서처럼 클린턴은 주먹을 불끈 쥐고 코소보에 즉시 나토(NATO)군을 파병했다.
학살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갖고서.
하지만 클린턴은 치밀하지 못했다.
코소보 파병은 UN상임이사국의 동의를 얻지 않은, 미국 독단의 결정이었다.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 같이 파병해야 했던 나토 가입국들의 불만도 높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분노가 제일 컸다.
당시 대통령은 보리스 옐친이었는데, 세르비아에 형식적인 파병을 하지만 미국은 옐친을 무시했다.
1999년은 러시아와 중국 둘다 힘이 미미할 때였기에 미국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이고 코소보 침공은 미국의 자신감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전쟁이 개시된지 3개월도 못 지나 세르비아는 클린턴이 제시한 평화 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세르비아군이 코소보에서 철수하자 코소보인들은 알바니아와의 합병 대신, 코소보라는 나라를 세웠다.
이걸로 코소보 사태는 마무리 지어진 걸로 보였다.
하지만 코소보 사태를 통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러시아는 이 상처를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결국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새 지도자가 부상하게 된다.
푸틴의 외교전략은 집권 초기부터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고 계속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미국이 반발하면 한발 물러서지만 미국이 나서지 않으면 철저하게 힘의 외교를 펼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푸틴은 미국을 잘 알고 있으며 미국이 언제 나서지 못하는가 바로 감지해낸다.
2008년, 부시 행정부에서 오바마 행정부로 바뀌자 푸틴은 행동에 나섰다.
그루지아의 영토 일부를 "러시아계 주민들이 원한다"는 이유로 합병해버린 것이다. (분홍색 지역들)
푸틴은 윌슨주의를 교묘히 악용하여 다른나라의 영토를 빼앗는데 써먹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미국인들은 푸틴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경고했으며 미국의 숙적은 결국 러시아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사임한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도 푸틴을 가장 경계하는 인물들 중 하나였다.
매티스는 물러날 때에도 트럼프에게 러시아를 조심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민족자결주의를 이용하여 힘의 외교(침략)를 펼치는 푸틴식 전략은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크리미아를 사실상 빼앗으면서 또다시 미국을 자극했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 오바마는 크리미아에 뛰어들지 못했다.
한편 2008년,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그루지아에서는 자기네 나라의 모든 표기를 러시아어식에서 영어식으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정식 국명이 그루지아에서 조지아로 바뀌었다.
군사력으로 러시아를 당해낼 수 없다면 문화적으로라도 러시아에게서 멀어지겠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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