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명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힌 일본 해적, 왜구
1550년무렵, 즉 임진왜란 발발 40여년 전, 명나라는 일본 해적들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역사상 '왜구'라고 불린 이 해적집단은 적게는 10명 단위에서 많게는 수만명이라는 불가사의한 규모로 배가 닿는 곳은 어디든 침략해왔다.
해적들이니만큼 돈 냄새를 잘 맡은 왜구들은 중국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인 '절강성'을 집중적으로 쳐들어왔는데 명나라는 싸우는 족족 처참하게 패배만 당하였다.
고작 해적들 따위에게 세상의 중심이라 부심부리던 명나라가 속수무책으로 쩔쩔매었건 것이다.
당시 왜구에 대한 명나라 사람들의 공포와 무력감이 어느정도였냐면, 한 번은 왜구가 명나라 제2의 수도인 남경까지 깊숙히 접근해왔는데 인근지역이 초토화될 동안 남경 수비군이 성 안에 틀어박혀 벌벌 떨기만 한 것이다.
수비군 규모가 무려 12만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명나라는 왜구에 대한 공포로 패닉에 빠져버렸고 왜구의 출몰이 잦은 해안지역은 아무도 부임하고 싶지 않은
지옥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장수들은 뇌물까지 써가며 제발 해안지역은 보내지 말아달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전례없는 혼란속에서 1555년 27살의 젊은 군인 한 명이 절강성에 부임하게 됐다.
그가 바로 척계광이었다.
왜구는 말 그대로 일본 해적이란 뜻이지만 이 집단이 우리 조상님들과 중국 조상들에게 가져다 준 공포는 가히 유럽의 재앙이라 불렸던 훈족 급이었다.
"도대체 정규훈련도 못받은 해적 따위에게 왜 이렇게 쩔쩔 맨 걸까?"
당시 일본은 일본 역사상 최대의 내전이라 불리는 '전국시대'를 맞이한다.
열도는 수많은 무력집단으로 분열되어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탈영병과 패잔병들이 양성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중국을 쳐들어 온 왜구들은 단순한 부랑자나 백수가 아니라 전국시대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이런 실전 베테랑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풍부한 전투경험 덕분에 왜구들은 전략과 전술에도 능통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 기록된 왜구들의 전술을 보면 기가 막힐 정도인데, 도망치는 척 하면서 길가에 재물을 흩뿌려 토벌군 병사들의 전열을 흐트러뜨린 뒤 곧바로 역습을 한다던가, 현지인 포로를 협박해 길가에 세워놓고 토벌군이 왜구의 위치를 물으면 일부러 반대쪽이나 미리 매복한 곳으로 가르쳐주도록 한 뒤 뒤따라가서 살육해버린다던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는 척 하면서 함정으로 유인한다던가.
이정도면 뭐 해적집단이라고 할 수가 없는 수준이이었다. 더구나 수백년간 평화속에서 지내던 명나라 군대이기에 더더욱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봤자 그냥 해적들일 뿐인데 저렇게 설쳐대는 것도 한계가 있을테고 정규군이랑 제대로 붙으면 아무래도 상대가 안되지 않을까?"
허나 왜구들은 무기도 만만치 않았다.
왜구들 중 가장 유명한 집단은 사쓰마지역 출신들이었으며, 사쓰마는 중국과 서양의 무역선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라 일찍부터 밀무역의 중심지이자 해적소굴이 됐지.
이 사쓰마집단이 유명했던 이유는 '사쓰마 지겐류'라고 불리는 검법때문이었는데 사쓰마 지겐류는 적과 마주하는 최일선의 병사들이 칼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가 기합소리와 함께 일제히 내리치는 일도양단의 검술이었다.
이들은 하루종일 내려치는 동작만 반복훈련해 근육을 단련했고 힘과 속도를 가히 독보적인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기록에 의하면 아예 칼날이 보이지도 않고 그냥 빛만 번쩍일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내려치기를 한 명도 아니고 한 줄에 선 병사들이 일제히 파도타기처럼 시전한다고 생각해보면...
"그래봤자 검일 뿐인데 그럼 창으로 찔러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다. 검보단 창이 확실히 유리하다.
허나 왜구들도 이미 이런 약점을 보완해놓은 상태였다.
검은 길이가 짧은 대신 찌르고 베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섬세함과 정확도가 높다. 허나 길이가 짧은만큼 위험도도 높기 때문에 보통 방패를 같이 들어 방어력을 높여야 했고 때문에 검은 한손무기인 게 당시의 정석이었다.
그리고 사실 전장에서 잘 쓰지도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장에서 외면받던 검을 과거 일본에서 개량해버린 것이다.
검을 양손무기로 만들면서 길이도 대폭 늘려버린 것이다.
양손을 다 써야 했기 때문에 방어력은 떨어졌지만 양손검의 장점은 명확했다.
찌르는 용도밖에 할 수 없는 창보다 양손의 힘을 모두 써서 찌르고 베고 내려칠 수 있기 때문에 섬세함과 파괴력, 정확도에서 창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무기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와 중국의 보병은 기본적으로 방패와 창을 들고 밀집대형으로 적을 압박하는 게 기본 전술이었다.
허나 밀집대형이라도 적과 실제로 맞부딪치는 건 최일선의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창 못지않은 길이의 일본도로 사쓰마 지겐류를 외치며 이두와 삼두, 승모근에 대흉근까지 사용하며 내려치기를 시전하는 왜구들에게 창 방패 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두동강이 나 버렸다.
왜구 침입 초반에 갑옷도 없는 훈도시 차림으로 방패도 없이 그저 칼을 양손으로 머리 위까지 높이 쳐들고 서있는 왜구들의 모습을 보고 우습게보고 돌진했던 명나라 군대가 내려치기 몇 번에 도주하다가 몰살당해버린 경우도 많았고 왜구들 중에 무예가 뛰어난 자들은 아예 밀집대형 가운데로 뛰어들어 순식간에 내려치기로 병사 두어명을 두동강 내며 대형 전체를 와해시켜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왜구에 대한 공포로 벌벌 떠는 훈련도 안되어 있는 일반보병들이 두동강 나는 동료들을 보며 느꼈을 패닉은 가히 상상도 못할 정도였을 것이다.
허나, 수천에서 수만명이 붙는 전쟁터에서 이런 내려치기 따위가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갑옷도 안입은 훈도시 차림인데 말이다.
이게 가능했던 건 '왜구'였기 때문이ㄷ. 기본적으로 왜구들은 약탈이 목적이었기에 몇 십명 단위로 움직였다.
허나 수십명 규모의 집단들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수비군도 같은 수로 분산되어 토벌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소규모 집단의 접전형태를 띨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전략의 일환으로 움직이는 군대가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약탈하러 홨기 때문에 수천 수만명이 개활지에서 진형을 짜고 벌이는 회전이나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몇달씩 벌이는 공성전등의 정규전투는 없었단 거고 이런 상황에선 위의 사쓰마 지겐류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중국의 강점은 인구가 많다는 건데, 항상 두 배, 세 배, 즉 더 많은 수를 데리고 가서 인해전술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대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가면 일단 기동력에서 불리한데다 왜구들은 토벌대의 규모가 좀 크다 싶으면 그냥 도주해버렸다.
대신 대군을 동원하느라 비어버린 인근의 다른 지방이 몰살당했다.
왜구들이 갑옷 하나 안 걸치고 훈도시 차림으로만 돌아다닌 것도 이런 '기동력' 확보 차원이었다.
사실 말을 데려가면 기동력 뿐 만아니라 한 번에 훨씬 많은 재물도 운반할 수 있고 더 멀리까지 약탈하러 갈 수도 있겠지만, 일본과 가까운 조선이면 몰라도 멀리 떨어진 중국까지 말을 데려가려면 배도 훨씬 커야하고 건초도 필요하니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라 말은 안 데려간 것이다.
때문에 약탈물을 사람이 직접 가지고 가야하니 무거운 갑옷은 여러모로 불편했던 것이다.
암튼 이 외에도 왜구들은 투창도 잘 던지고, 지형지물 활용도 잘하고 매복도 잘하고 기습도 잘하고 기만술도 잘 썼기 때문에 명군은 처참하게 도륙당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럼 중원에서 열심히 무공 익히고 있는 강호의 무림고수들이라도 데려다 쓰면 어떨까?"
우스운 이야기지만, 실제로 이 무렵 명나라에서 무림고수들까지 동원했었다.
왜구들의 검술이 워낙 현묘해서 칼을 휘두르면 사람은 안보이고 칼날만 보인다는 보고를 받은 명나라 조정에도 화려한 초식과 날쌘 몸놀림을 떠올리며 무림고수들을 초빙하기로 했다.
물론 현실적인 병부상서는 헛소리라며 반대했지만, 군대 경험 따위 없는 대신들은 다들 무림고수라는 이미지에 흥분하며 적극적으로 추친했다.
그리고 결과는 단 한 명도 살아돌아오지 못했다.
이제 더이상 기대해 볼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아버린 중국인들은 그저 자연재해 대하듯 하루빨리 이 고통이 지나가버리기만 빌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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