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중세 세계를 뒤흔든 흑사병이 유럽과 세계에 미친 영향
1) 흑사병의 기원
흑사병(黑死病, plague), 즉 페스트는 13~14세기 유럽의 인구 1/3을 몰살시킨 질병이다.
페스트균에 감염되면 2~10일의 잠복기를 지나, 두통과 발열이 나고 림프절이 붓기 시작하며, 결국엔 감염부위가 검게 변하며 며칠 안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흑사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바로 쥐로부터 출발하는데, 흑사병은 쥐 벼룩을 통해 옮겨지는 병이기 때문이다.
최근 기술의 발달로 흑사병을 일으킨 페스트균의 유전자 계보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때 세계인을 운지시킨 페스트는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국 남부지역, 현재의 윈난성 지역으로 삼국지의 맹획이 날뛰던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서 흑사병이 출현하게 된 까닭은 이 지역의 전통가옥이 우리나라 제주도와 비슷하게 집안에 담장을 두르고 특산물인 돼지와 여러 가축을 길렀기 때문으로 추청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가축 우리를 넘나드는 쥐들과 인간사이의 접촉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 흑사병의 확산
그런데, 사실 페스트 이전부터 존재했던 여러 치명적 전염병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사망에 이르게 했지만, 세계적인 전염병의 창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12~13세기 일어났던 세계사적 변화는 이러한 질병의 양상을 단번에 바꿔버리게 된다.
그건 바로, 바로 몽골제국의 출현하여 유라시아 대륙이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이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고려에서부터 중동을 거쳐 동유럽에 이르는 유라시아 전지역을 초토화시키고 다니면서, 쥐의 벼룩을 전세계 곳곳에 열심히 퍼뜨리게 된다.
사실 유럽의 흑사병이 워낙 세계사적 영향력에 강렬하게 남아서 그렇지, 당시 흑사병은 중국인구의 약 2~30%를 감소시켰다고 한다.
또한 1409년, 동아프리카 연안에 까지 다다랐던 정화함대의 원정으로 15세기 초에는 동아프리카에 흑사병이 유행하기도 했다.
어쨌든, 달리는 몽골의 말 등에 붙어서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으로 내달린 쥐벼룩들은, 마침내 흑해연안까지 이르게 된다.
1347년, 킵차크 한국은(징기스칸의 정복 이후 성립된 몽고의 4한국 중 하나), 흑해 연안의 도시 카파를 포위공격하는 과정에서 흑사병에 걸려 죽은 시체를 성벽 안쪽으로 쏘아던져 넣게 되는데, 질병을 옮기는 화학전이자, 적들의 사기도 떨어뜨리는 심리전의 성격을 띤 공격이었다.
카파를 점령하고 있던 제노바 공국 측도 시체를 열심히 바닷속에 수몰시켰지만, 모든 시체를 제때 처리할 수가 없었고, 전쟁 이후 페스트는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카파에서부터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상인들에 의해 페스트는 마르세유, 제노바, 콘스탄티노플 등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로 퍼지게 된 페스트는 결국, 유럽 인구의 25~40%이던 2500만에서 4000만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으로 발전하고, 이는 17세기 중엽, 런던 대역병 이후 진정될 때까지 2~300여년간 유럽인들을 공포로 몰아넣게 된다.
3) 유럽사회에 미친 영향
이후 약 200년간 대유행한 페스트는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먼저, 가장 큰 영향은 역시 인구의 감소라고 할 수 있다.
페스트 발병 이전 유럽은 8세기 이후 인구가 약 2배 가까이 증가한 1억 5천만명 정도였는데, 이후 200년간 약 30%의 인구가 증발해버린다.
특히 질병이 심했던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는 마을 인구의 80~90%가 감소해버리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인구 수준을 회복하는 것은 16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라고 보고 있다.
이탈리아 시에나의 역사기록가 아뇰로 디 투라의 기록을 통해 당시의 참상을 엿볼 수 있다.
"매일 밤낮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역병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머지 않아 온 땅이 묘지로 덮이리라. 나 또한 다섯의 아이들을 내 손으로 묻었다. 이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이렇게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던건, 당시의 취약한 의료-위생 수준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한데, 제대로 된 치료법을 몰랐던 당시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하며, 자기 몸에 채찍질을 하거나, 개와 고양이가 질병의 원인이라 하여 고양이와 개들을 대규모로 잡아죽이거나, 혹은 집시와 유대인, 한센인들이 질병을 몰고 왔다며, 이들을 고문하고 마녀사냥하기도 했다.
또, 당시 의학이라고 해봤자, 형편없는 수준으로 중세의 의사들은 페스트 감염을 피하기 위해 새 부리 모양을 한 기괴한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달군 쇠로 환부를 찌르거나 정맥을 째서 피를 뽑고, 심지어는 오줌으로 목욕을 시키는 방법을 써서 쇠약해진 환자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만 불러왔다.
이러한 페스트균과 인간의 싸움이 인간의 승리로 끝나기 까지, 인류는 19세기 파스퇴르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페스트가 끼친 보다 근변적인 영향은 사회변화는 바로 중세사회의 변화와 이를 통한 혁신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중세 유럽의 거대한 두 축인, 봉건 농노제도와 교회권력의 붕괴는 페스트 때문에 촉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기도해도 도움을 주지 않는 신에 대해 혼란을 느낀 사람들이 차츰 교회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고, 인구 감소로 인해 각 지방을 지배하던 중세 영주들의 장원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일손이 부족해지자 농노들이 수요공급의 자연스런 법칙에 따라 예전에 비해 더 많은 대가를 받게 되었다.
또한, 질병으로 인해 가족과 고향을 잃은 사람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들었고, 새롭게 생겨나는 많은 도시들에서는 귀족 출신이 아니더라도 돈을 많이 모아서 신분을 높인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
유럽에 르네상스 시대가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4) 흑사병 이후의 세계
흑사병은 1500년대 이후 산발적으로 발생하다가 1600년대 이후 진정되었지만, 유럽인들의 뇌리에 강렬히 남아 다양한 형태로 그들 문화 속에 남게 되었다.
피리로 쥐들을 강물에 운지시켰다가, 마을 주민들이 제대로 보상하지 않자, 피리로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졌다는 동화 피리부는 사나이는 흑사병의 기억을 가장 강렬히 나타내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베니스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카니발 가면은, 흑사병 당시 의사들의 마스크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흑사병은 유대인과 집시 같은 외부 소수 인종들에 대한 혐오감을 심화시키는 계기로 여겨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200년간 유럽 인구의 1/3을 증발시킨 흑사병 폭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건강한 유전자를 살아남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 사람들은 200년 뒤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남아메리카 대륙 인구의 절반이 넘는 2000만명을 천연두로 몰살시키면서, 강력한 질병으로부터 살아남은 후손들의 강력한 유전자를 증명하게 된다.
불과 100년전에 페스트로 인구의 1/3이 증발한 유럽에서 살아남은 후손들이, 예컨대 코르테즈 이끌고 간 500여 명의 군대가 아즈텍에서만 500만~800만 명을 천연두로 증발시킨 것에서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5분 재미있는 역사 상식 > 5분 재미있는 세계사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사]17세기 남양에서 맞붙은 왜구와 영국해적 (0) | 2019.08.06 |
---|---|
[일본사]수백년전 태평양을 건너 유럽으로 간 동양인들 (0) | 2019.08.06 |
[세계사]300여년 전 흑인 노예들을 운반하던 방법 (0) | 2019.08.03 |
[유럽사]그루지아가 조지아가 된 이유 (2) | 2019.08.03 |
[중국사]명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힌 일본 해적, 왜구 (0) | 2019.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