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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일명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일어난 마오쩌둥의 퇴진 이후 마오의 불타는 권력욕과 당대의 사회문제에 반발한 젊은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생겨난 일종의 극단주의 조직이다.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준동했고, 중국의 근대화를 최소한 10년어치는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집단이며, 이들의 만행으로 중국은 불과 10여 년 동안 100년이 지나도 메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지금도 그 후유증이 상당부분 남아있을 정도이다.

병(兵)(病)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중국 공산당의 군대인 중국 인민해방군과 직접적인 연결은 없다. 본래는 학생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조직이었으며 준군사조직 같은 성향이 있기는 했으나 본질은 운동조직으로 군 조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집단광기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8월 23일에 홍위병은 상하이에서 약 서른여섯개에 달하는 꽃가게를 공격했다.
관상용 식물과 꽃은 낭비이며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뒤이은 며칠 동안 홍위병은 도시 곳곳에서 공원 화단과 온실을 휘젓고 다녔다. 이에, 공들여 제작된 암석 정원과 금붕어 연못이 파괴되었다.

장례식에서 꽃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태생적으로 착취적인 화훼농업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복잡한 경제 계산이 이루어졌으며 당의 한 충실한 일꾼은 1965년에 상하이에서 판매된 300만 다발의 생화를 재배하려면 프롤레타리아 계급 3000명이 1년 동안 먹을 양곡을 생산할 수 있는 면적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개는 1950년대 초반에 공중 위생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사냥당해서 전국의 도시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씨가 마른 터였다. 홍위병이 순찰을 돌며 타락한 부르주아의 상징인 고양이를 죽이면서 이제는 고양이를 상대로 한 대대적인 학살이 진행되었다. 베이징에서 자신의 교사를 맹비난했던 열다섯 짜리 학생 양레이는 자신이 기르던 애완용 고양이를 몰래 집 밖으로 빼돌리려고 했다. 그녀가 든 가방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홍위병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이내 눈치챘다. 그들은 가병을 거머쥐고 붕 휘둘러서 벽돌 담장에 내리쳤다.
<소년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고양이가 든 가방을 계속해서 벽에 내리쳤다.>
그녀의 남동생이 울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제발 그만하라고 애걸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8월 말이 되자 베이징의 거리에서는 앞쪽 두발이 묶인 채 길가에 죽어 있는 고양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비둘기 경주를 공격한 것은 성과가 별로였다. 비둘기 경주는 19세기에 외국인을 통해 유입된 취미였다.
1929년에 상하이에서 최초의 전서구 클럽이 문을 열었으며 머지 않아 이 지역의 열광적인 애호가들은 방향 감각과 지구력, 속도에서 차별화된 비둘기 품종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상하이가 해방되었을 즈음에는 아홉 개의 서로 다른 비둘기 클럽이 존재했는데 1964년에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하나의 협회로 모두 통합되었다.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회원의 절대 다수는 노동자였고 그들이 기르는 비둘기가 대략 3만 마리였다. 그들과 별개로 독자적인 애호가들이 허가를 받지 않고 기르는 비둘기가 추가로 2만여 마리에 달했다.

비둘기를 키우는 사람들이 비난을 받았는데 수천 명의 노동자를 부양할 수 있는 소중한 곡식을 낭비한다는 이유였다. 홍위병은 먼저 이틀 안에 비둘기를 모두 죽이라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런 다음 순찰을 돌면서 상하이 곳곳의 건물 옥상에 산재하는 비둘기장을 파괴했다. 시 당국도 이후 몇달 동안 수백명의 비둘기 사육사를 체포하여 홍위병을 도왔다.

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그 장소를 옮겼을 뿐 비둘기 사육은 계속 명맥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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