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으로 망하고, 아편으로 부흥한 나라, 중국(3편)
1912년,청을 무너뜨린 원세개는 청 멸망 이후 오래잖아 야심을 드러냈는데, 손문이 위임한 중화민국 총통 자리까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되려 했다.
1915년,원세개는 국호를 중화제국이라 하여 초대 황제에 올랐으나, 국민당의 반발과 민심 이반,심지어 심복들조차 황제 즉위에 부정적이어서 제대로 된 황제 노릇을 할 수 없었던 데다 중병까지 겹친 원세개는 황제 즉위 7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원세개 사후,단기서나 풍국장, 여원홍같은 원세개의 부하들은 서로 갈라져 군벌이 되었으니 바야흐로 군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는데, 이 당시 중국은 미, 영, 프와 함께 연합군에 참전하여 다수의 비전투 인력들을 보내 승전국의 대열에 올랐으니 그 대가로 중국은 1917년부터 아편 수입을 금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아편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는데, 이미 청 말 4000만명에 달하는 아편 중독자들이 있을 정도로 중국은 아편에 극심하게 찌들어 있는 상태였던 데다 원세개의 등장과 군벌들의 난립으로 아편 소비량과 생산량은 더욱 늘어났다.
군벌들이 장악한 지역에선 농민들에게 아편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를 재배하라고 강요했으며, 이로 인해 식량 생산은 줄어들어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1928년,북중국에 닥친 가뭄은 수백만명의 이재민을 낳았으며, 하남성 일대에만 400만명이 피해를 봤다고 할 정도였다.
거기다 손문, 장개석같은 국민당군 조차 군자금 확보를 위해 아편을 유통, 판매했다 하니 중국은 그야말로 아편으로 돌아가고, 아편으로 사는 나라가 되어 버린 것이다.
중일전쟁 당시 판도와 독단으로 중국과 교전을 벌여 중일전쟁을 일으킨 무다구치 렌야(모전구렴야,牟田口廉也)
이런 상황에서 1931년 북지사변이 벌어졌고, 1933년엔 열하사변이 발생하여 일본과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는 데다 1937년, 북경 근처에서 노구교 사건이 발생해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중일전쟁 기간동안 일본군의 학살로 인한 사망자와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약 3500만명에 달할 것이라 추측되며,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거기다 일본군 역시 아편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는데, 당시 일본군에서 많이 쓰이던 각성제이자 진통제가 모르핀이었는데 이 모르핀은 아편을 농축시켜서 한번 더 가공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군 역시 중국에 넘어오자 아편을 찾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아편 생산량과 중독자 수는 더욱 많아졌다.
한마디로 자국민이건 침략군이건 농민이건 군벌이건 고위층이건 모두 다 가리지 않고 아편(모르핀)에 중독되었으니 중국은 하나부터 열까지 아편에 의존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아편 사용자가 6000만명이 넘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알려지지 않은 아편의 최대 판매자이자 수혜자가 있었으니,
바로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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