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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III Magnus)을 기억하고 있다

 

많은 일게이들이 무수히 접해왔던 가우가멜라 전투(Battle of Gaugamela)의 명성만큼 

군사 전술가로서의 알렉산더의 면모는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며 감탄을 자아낼 정도이므로 사실 그를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이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는 세계의 반 이상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의 열정과 욕망은 이에 그치지 않았고 그는 곧 더 넓은 제국의 영광을 꿈꾸며 인도로 향했다

그리고 이제 알렉산더와 그의 군대를 막아선 것은 거대한 두 개의 강과 인도의 75만 대군이었다

 

자 지금부터 히다스페스 강 전투(Battle of Hydaspes River), 그날의 치열함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기원전 331년 아벨라(Battle of Arbela)의 전장에서 50,000명의 그리스 군과 페르시아 군이 격돌했다

정말이지 그 둘은 수백년 간의 원한이 사무친 특별한 관계였고 각자의 시선에 서로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물론 대부분 예상하듯 페르시아는 그래도 아직까지 대국이었기에 숫적으론 그리스 군의 두배 규모에 달했다

 

하지만 10월의 어느날

이 전투의 기적적인 승리가 인류 역사의 큰 힉을 그었다

그리고 그리스 군 승리의 토대는 25세 젊은 지휘관의 전술에 있었다

바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말이다

 

 

알렉산더에겐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잘생긴 외모에 탄탄한 근육질의 몸은 물론이고 사람을 잡아끄는 흡입력이 있었던 것이다

덕분인지 그의 부하들은 그를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고 기어이 알렉산더를 위해 목숨을 내걸었다

 

사실 그를 지지했던 이들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채 5년도 되지 않아 페르시아(Persia) 대제국을 파멸시킨 그들의 왕은 그야말로 기염을 토했던 것이다

관련해선 케나다 육군 참모 대학교(Royal military of Canada)의 석학교수인 Richard A.Gabriel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5년 만에 내부의 반대파를 제압한 알렉산더는 마침내 오늘날의 이라크(Iraq)인 아벨라에서 

일대결전 끝에 남은 페르시아 군을 일망타진했고 그 정복의 대가로 페르시아 전체의 제왕이 되었습니다.

부계로는 헤라클레스(Hercules), 그리고 모계로는 아킬레스(Achilles)의 후손이라는 전설의 그 혈통만으로도 그의 운명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것이겠죠. "

 

알렉산더의 제국은 그리스(Greece), 이집트(Egypt)에 이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까지 뻗은 가히 사상 최대의 제국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번영을 향한 욕망은 끝이 없었고 페르시아를 물리친 지 5년 만에 그는 또다시 새로운 적을 상대하게 된다

 

 

목표는 바로 인도(India)

결국 알렉산더는 인도 침공을 위해 32,000명의 검증된 병사들과 인더스(R. Indus) 강둑 옆에 당당히 도열하기에 이른다

 

" 30살도 안 된 알렉산더에겐 바쁜 8년이었습니다.

강력했던 페르시아와 처절한 전투 끝에 제국의 왕이 되었고 이집트는 알아서 저항을 포기하며 그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파라오가 됐죠.

이제 그는 시선을 돌려 인도를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

 

- David George

지중해 고고학 학회 이사(Director. Institute of Mediterranean)

 

 

" 지리학과 전략적인 관점에서 문제는 인더스와 히다스페스라는 두 개의 거대한 강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많은 지휘관들이 이를 불가능하다 여기긴 했지만 알렉산더만큼은 뜻을 굽히지 않았죠.

그도 그럴 것이 알렉산더는 이미 침공 2년 전부터 시리아 해안 지역의 선대 목공들을 불러모아 인더스 강을 건널 배를 건조하도록 했거든요. "

 

- Mark Schwartz

그랜드 밸리 주립대학 인류학 박사 (Grand Valley State University)

 

 

인더스 강을 건너면 우선 탁실라(Taxila)의 지배자 암비(Ambhi) 왕이 그를 맞설 것이었다

탁실라는 인더스 강과 히다스페스 강 사이에 놓인 펀자브(Punjab)의 수도였다

 

여기서 암비의 선택지는 두 개였다

일단은 맞서는 것

하지만 그랬다간 십중팔구 도시는 처참히 멸망할 것이고 그 자신 역시 목을 보전키 힘들었다

더욱이 알렉산더는 적군의 지도자를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였다고 하니 

아마 암비 왕에게 다가온 공포심은 특히 남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선택지는 바로 인도 침공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

그렇게만 한다면 도시를 구하는 것은 물론, 뭐 어쩌면 자신의 왕위를 지키는 것이 가능할 지도 몰랐다

 

 

결국 암비는 현명하게 대결을 피했다

알렉산더는 덕분에 손쉽게 탁실라를 손에 넣었고 인도 진출의 작전기지로 삼았다

 

이제 그에게 남겨진 다음 난제는 160km 떨어진 히다스페스 강을 건너는 것이었는데 난 인물은 난 인물인지 

알렉산더는 역시 이에 대한 해답도 미리 마련해두고 있었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앞서 인더스 강을 건널 때 사용했던 배들이 일종의 조립형 선박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히다스페스 강을 건너기 전 알렉산더는 며칠의 여유시간을 두고 

선박의 뼈대에 따로 분리시켜 옮겨온 외피나 타르 등을 재조립시키면 준비는 그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마침내 병사들과 도강을 시작했고 무려 2달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병력은 총 보병 23,000명 기병 9,000명이었다

자 이토록 많은 병력이 그 끝도 불확실한 원정에 기꺼이 참여한 이유에 대해서 Richard Gabriel은 이렇게 설명한다

 

" 그들은 명예와 변영을 위해 싸웠습니다.

과거를 잠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비록 전설이지만 천년 전의 아가멤논(Agamemnon)부터 아킬레스와 헤라클레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위대한 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위대한 전사는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었죠.

 

결국 알렉산더와 그 군대에게 있어 영웅이란 본질적으로 끝없이 승리를 탐하는 용맹한 전사였고 이러한 생각은 정신적으로 그들 삶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

 

 

다만 히다스페스 강 건너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적군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용맹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인도의 왕 포라바의 포러스(Porus)가 군대를 지탱하고 있는 탓이었다

포러스는 군인 왕의 역사를 계승한 왕으로 180cm가 넘는 키를 자랑하던, 당시 기준으론 소위 '거인'에 해당하던 자였다

 

 

유승민이 대선토론 중 한 발언처럼 '전쟁은 해도 대화는 한다' 했던가

알렉산더는 평소처럼 외교를 먼저 시도했다

회의를 위해 포러스를 초청한 것이다

 

사실 말이야 대화지, 이는 왕위를 포기하고 공물을 바치면 파멸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반협박에 불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포러스는 이러한 협박조의 제안에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전설적인 그 알렉산더를 친히 도발하고 나섰다

말 그대로 어디 전쟁터에서 한번 붙어보자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포러스는 다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토록 의기양양할 수 있었던 것일까?

Mark Schwartz는 이를 이렇게 보고 있다

 

" 포러스는 자신의 왕국을 지키려 만반의 채비를 갖췄죠.

휘하 보병 30,000명에 기병은 말할 것도 없고 300대의 전차까지 동원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중 알렉산더도 그리스도 미처 몰랐던 것이 있었죠.

바로 200마리나 되는 대규모의 전투 코끼리 부대였습니다. "

 

코끼리는 인도군에게 있어 당대 최고의 병기였다

훈련엔 약 10년 정도, 실상 꽤 많은 시간이 투자되지만 뭐 조련 효과만큼은 탁월했으니까 말이다

실로 이 덩치큰 동물은 이름에 답하고 휘파람에 반응했으며 적군에겐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자 이쯤에서 상황정리를 한번 하고 넘어가자

 

설명하자면 우선 히다스페스 강 동쪽엔 인도군을 거느린 포러스가 알렉산더의 도강을 기다리고 있고

서쪽 강둑엔 알렉산더의 군대가 강을 건널 기회만 엿보고 있다

그 사이엔 깊고 거센 히다스페스 강이 흐르고 있고 말이다

 

사실 알렉산더는 난관에 부딪힌 셈이었는데

32,000명의 대군이 이 넓은 강을 은밀히 건너가 적을 기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그냥 건너버리자니 그러면 대병력은 포러스엥게 산 채로 갖다바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강 중류를 막 건널 참이면 대부분의 그리스 군은 이미 벌집이 되있을 것이 불보듯 뻔했으니까

 

그 말인 즉, 알렉산더는 형 상황을 타개할 전략이 시급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명성은 역시 거저나온 것이 아니다

예상대로 그는 이내 기발한 전력을 세웠고 끝내는 전세를 보란듯이 역전시킨다

전략의 구체적인 부분은 다시 한번 Richard Gabriel의 설명을 빌리도록 하겠다

 

" 알렉산더는 강 건너편의 적군이 아군을 경계하자 보급대에게 식량부터 가져오라 명했습니다.

일종의 심리전을 펼친 것이죠.

그때가 마침 늦은 봄이었거든요.

 

사실 적군의 눈엔 수심이 얕아질 때까지 넘어올 생각이 없는 걸로 비쳤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작전은 제대로 먹히며 인도군은 이내 안심하게 되었죠.

 

다음으로 알렉산더가 취한 행동은 병력을 이동시키는 거였습니다.

이것 역시 알렉산더가 의도한 교란 작전이었는데 대부분 기병에 약간의 보병을 섞어 강둑을 따라 위 아래로 반복 이동시킨 것이었죠

 

뭐 포러스가 보기엔 영락없이 도강지점을 미리 찾는 것이었을 겁니다

나중에 이용할 길을 말이죠. "

 

 

" 포러스는 상대가 건널 곳을 알아내 병력을 미리 배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스꽝스럽지만 포러스의 부대는 알렉산더의 군대를 위 아래 반복해서 따라다녔죠.

 

2주 정도를 따라다녔을까

역시나 도발의 징조가 없자 정찰이 무의미하다 판단한 포러스는 드디어 병력을 뒤로 물렸고 대신 강 근처에 깃발을 세워두었습니다. "

 

모두 알렉산더가 의도한 바였다.

이제 그는 두번째 작전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스 군은 밤마다 불을 피우고 소란을 떨어 주의를 끌었다

포러스의 병사들이 강둑의 소음을 당연히 여기게 만든 것이다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일 수도 있는데, 실상 전술적으로 상당한 이점을 얻은 것과 매한가지였다

알렉산더의 입장에서 아군을 마음대로 이동시켜도 강 너머의 적은 전혀 대응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즉, 기본적으로 포러스의 군대로 하여금 관심과 긴장을 늦추게 한 훌륭한 전략이었던 셈이다

 

 

결국 두 달 후

마침내 알렉산더는 어둠을 틈타 병력을 이끌고 나왔다

앞선 조치들 덕분인지 포러스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알렉산더와 그의 군대에게 도강지점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고 

우선적으로 보병 10,000명과 기병 궁사 1,000여 명을 포함한 기병 6,000명이 강둑으로 27km를 거슬러 오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날 심야의 도강 중 이들은 적에게 발각되는 것 외에 예상치 못한 히다스페스 강의 변수를 맞닥뜨리고 만다

 

오른쪽 윗부분, Bactria랑 Sogdiana

 

자 여기서 각 군대의 전력에 대해 체크하고 가자

 

우선 알렉산더의 군대는 말 그대로 단련된 전투기계와 같았다

모두 앞서 경험한 10년 간의 전투를 통해 돈 주고도 못 살 값진 자체적 발전과 개선을 거듭한 덕분이었다

 

그들이 거친 전투 중 가장 난색을 표했던 것은 3년 전 지금의 파키스탄(pakistan)과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알렉산더 제국의 극동

박트리아(Bactria)와 소디아나(Sogdiana) 지역에서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을 만났을 때였다

 

 

세인트 안셀름 대학(Saint Anselm College)의 고전학 교수인 Matthew Gonzales가 말하길,

'중앙 아시아인은 카스피 해(Caspian Sea)의 유목민으로서 탁월한 사수에다 험한 산에서 살아남은 강인한 부족' 이었다

 

실로 치고 빠지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던 전략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알렉산더 군은 이런 식의 공격에 익숙치가 않았다

그리스 군은 늘 여러 줄의 대형으로 밀집해 전진하는, 즉 팔랑크스(Phalanx)였는데

말 탄 중앙 아시아의 이 게릴라 군에겐 이를 무력화시킬 명중력 놓은 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첩함을 바탕으로 한 이 기병들은 마주치면 집중포화를 쏟고는 이내 빠르게 후퇴하곤 했는데 그리스 군에겐 아주 눈엣가시가 따로 없었다

 

 

이후 이러한 유형의 강적에 대비해 알렉산더는 부대 내 경기병 사수를 보다 보충했다

뭐 사실상 페르시아 출신으로 새롭게 군대를 편성한 셈이었다

 

그리고 이 부대는 동쪽 지방에서의 2년 간 게릴라 전으로 그 가치를 충분히 증명해 보였고

이제 알렉산더의 시선은 드디어 더 동쪽인 인도로 향했던 것이다

 

인도 16대국 시대, 혹 15개국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실 지도상 Mathura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Sursena'라는 왕국이 하나 더 있었다

 

다만 포러스의 군대 역시 이에 못지 않은 강군이었다

특히 실전 경험이 아주 풍부했는데 당시 시대상 인도는 16개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서로를 정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투를 벌여왔다

전쟁이 일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앙 유라시아의 아리안 족(Aryans)이 이동해 온 천년 전부터 인도에선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David George는 이렇게 설명한다

 

" 대 이동의 역사입니다.

이들의 모습이 궁금하시면 그냥 TV에서 아프가니스탄 부족민들의 모습을 보시면 되요.

이 산악 지대의 북쪽은 18세기 이래 유전적으로 전혀 섞이질 않아 아리안 족의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거든요.

키 크고 짙은 눈매에 수염을 기르고 말과 전차를 탔던 이들 말입니다.

 

당시 이들은 짧은 기간 동안 빠르게 인도를 정복해 나갔어요.

그리고 그로부터 적어도 천년 동안은 인도 내 전쟁은 하루도 쉴 날이 없을 정도였죠. "

 

악인 라바나(Ravana)는 손 뿐만 아니라 머리도 여러 개다

 

더불어 인도는 금을 비롯한 금속 자원이 풍부했고 당시로는 최고다 평받는 무기 제조술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기원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악인 라바나(Ravana)의 수많은 손에 들려있는 무려 18종의 무기로 말미암아 말이다

당시 인도인들이 얼마나 다양한 무기를 썼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또한 인도의 고대 왕들은 정말로 전술에 능통했다

그리고 그 능력은 포러스 왕도 못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산더엔 미치지 못한 탓일까

기원전 326년, 그의 경계를 피해 알렉산더의 군대는 이미 상류로 27km 지점을 건너고 있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그리스 보병 10,000명과 페르시안 기병 사수 1,000여 명을 포함한 중기병 6,000명이 다 같이 격랑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사실 심야 도강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기상조건이라니 이젠 망했구나 싶은 일게이들이 있을 지 모르겠으나, 

실제론 폭우가 병력 이동의 소음도 덮어주었고 적군의 시선 역시 어느정도 차단해 준 바 알렉산더 군에게 결과적으로 여러모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때까진 알렉산더 역시 도강지점을 잘 골랐다며 성공을 확신했다

위 그림처럼 강둑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섬이란 걸 깨닫기 전까진 말이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상륙한 첫번째 섬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섬도 발견되었다

 

결국 그리스 군은 두번의 도강을 더 해야 했고 그들에게 시간은 촉박했다

 

 

" 알렉산더는 한 가지 실수를 범했는데, 바로 도강지점을 정찰할 때 병사를 끝까지 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섬과 뒤의 강둑만 확인하게 했는데 알고보니 그게 강둑이 아니라 또 다른 섬이었던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뭘 어쩌겠어요?

일단 건너긴 해야하니 급히 섬의 위 아래를 훑으며 도강지점을 수색하는 수 밖에.

끝내는 가슴 깊이까지 물이 차오르는 도강지점을 발견했고 도강에 성공하긴 했지만 새벽 무렵, 강둑에 닿았을 때

그의 군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말 그대로 물에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있었습니다. "

 

 

 

한편 뒤늦게 알렉산더의 도강 소식을 전해들은 포러스는 실로 진퇴양난의 국면이었다

알렉산더가 강을 건넜다는데 눈으로 확인하기로 강 건너엔 또다른 그리스 대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또한 전날 밤, 현명하게도 병력을 나눠 도강한 알렉산더의 전략 탓에 

16,000명의 군사들은 강을 건넜지만 나머지 절반의 병력은 여전히 강 건너편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포러스로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건너 온 알렉산더의 군대가 주병력인지 그저 속임수를 위한 병력인지 알 길 이 없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섣불리 알렉산더를 맞서러 나선다면 그 남은 병력은 즉시 강을 건너 후방에서 협공해 올 것이 분명했다

 

 

결국 딜레마에 빠진 포러스가 내린 결정은 소규모 정찰부대만 보내어 건너온 그리스 군을 상대토록 하는 것

그리고 이는 대군을 강 반대편에 남겨두고 절반 가량의 군사만 데려온 알렉산더가 의도한 대로 

포러스가 도강 병력을 소수의 병력이라 착각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포러스는 오직 4,000명의 중기병과 전차 200만을 적에게 보냈다

이 정찰대의 지휘관은 포러스의 아들인 또다른 포러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알렉산더는 대응하기 위해 휘하 중기병을 몰아 남쪽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포러스의 중기병과 전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알렉산더는 그 압박감엗 불구하고 급히 병력을 재편한다

그 이유를 Mark Schwartz의 설명에서 알아보자

 

" 알렉산더는 언제 어떻게 공수전환을 해야할 지 순식간에 파악하는데 일가견이 있었어요.

포러스의 병력 편성을 본 그가 즉시 자신의 중기병을 퇴각시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죠.

전차와 중기병을 오로지 중기병만으로 맞선다는 건 사실 좋은 판단이 아니었으니까요. "

 

 

" 알렉산더가 보기에 경기병을 보내 적의 진군을 막는 것이 전술적으론 더 나아보였어요.

그래서 그는 곧바로 이란인 궁사들을 내보냈죠.

바로 페르시아 제국과 싸울 때 그들에게서 배운 전술의 일환으로 말입니다. "

 

얼마 후 알렉산더의 경기병 궁사들은 포러스의 정찰부대와 맞닥뜨렸다

그리고 이것이 히다스페스 강 전투의 시작이었다

 

 

기원전 326년

고대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히다스페스 강 전투가 막 시작됐다

그리고 젊은 포러스가 이끄는 중기병, 전차 부대에 맞선 알렉산더의 기마 궁수들은 이들에게 연신 화살을 퍼부었다

 

당시 그리스 군의 궁사들은 동물의 뿔에 사슴이나 영양의 다리 힘줄을 씌운 가벼운 궁을 사용했는데 

이는 실상 그들이 기존에 자랑하던 치고 빠지기식 게릴라 전술엔 아주 안성맞춤의 병기였다

더군다나 적 근처엔 가까이 가지도 않은 이들은 갑옷은 착용조차 하지 않았다

 

 

한편 이를 상대하고 있던 인도 군은 여러모로 애를 먹긴 했으나 딱히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터번으로 머리를 감싼 이들은 면이나 양모를 두 겹으로 대고 속은 목화 솜으로 가득 채우는 식으로 만든 아주 튼튼한 갑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라 할 것은 쏟아지는 화살에 더 이상 기동성을 갖춘 진군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군사들의 사기저하나 대열이탈, 한 곳으로 병력이 집중되는 등의 2차, 3차적 문제들이 연달아 발생했다

 

 

알렉산더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이끄는 중기병 부대는 그 즉시 속력을 올렸고 포러스의 부대를 강타했다

 

자 그럼 인도 군은 가만히 있었느냐고?

물론 인도 궁사들도 이내 정신을 차리곤 후속 병력으로 전진하는 보병대에 활을 겨누었다

하지만 청동을 씌운 나무방패가 그리스 병사들을 화살로부터 보호해주었고 더욱이 전날밤 내린 비로 진흙탕이 된 전장은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땅이 질퍽대는 바람에 무거운 전차는 마음껏 내달릴 수가 없었고 결국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숫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완패한 인도 군은 곧바로 중기병 500여 기를 잃고 패주하기 시작했고

그 사망자 중에는 젊은 포러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패주한 병사들로부터 강을 건너온 알렉산더의 군대가 주공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포러스는 이에 맞설 준비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대가 강 건너편에 남아있어 자칫 후방에서 공격받을 수 있음을 우려한 포러스는 

이에 대비해 강력한 후방 수비대를 남겨놓고 나머지 병력을 몰아 강 상류로 향했다

그리고 약 3시간 후, 드디어 두 군대는 서로를 바라보며 대치하게 되었다

 

 

사실 포러스는 자기 입장에서 될 수 있는 한 마른 땅을 찾아 군을 배치한 것이었다

마른 땅이 필요했던 이유는 바로 남은 100대의 전차와 전투 코끼리 대부대를 운용해야 했기 때문이고 말이다

 

한편 포러스가 병사들을 배치 중에 있을 때, 몇 킬로미터 떨어진 북쪽에선 알렉산더가 지원을 보강했다

도강 지점엔 주병력을 두고 원래 본진과 도강 지점 중간 쯤 예비병력을 따로 떼어두는 형식으로 말이다

 

즉 지원군은 총 3부대로 나뉜 셈이었으며 

특히 중간 지점에서 도강하는 예비병력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 보병 4,500명과 기병 3,000명으로 이루어진 젊은 병사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비병력은 강을 건너 선발대와 합류했다

하지만 지원을 나선 후방 병력의 병종은 오로지 보병만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아무래도 앞선 병력에 비해 기동성이 부족했고 따라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알렉산더는 전투 지연을 위해 다시 한번 페르시아 기병 궁사들을 내보냈고 이들은 전장을 휘저으며 인도 군에 화살을 퍼부었다

 

 

전운이 알렉산더의 손을 들어준 것일까?

 

하필 이런 유리한 상황에 포러스는 아직 전투 준비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뭐 사실 그 이유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군대가 화살비 아래 있으면서도 딱히 움직이지 않은 것은 

어쩌면 이렇다 할 전술이 아직 떠오르지 않아서였는 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덕에 후방의 그리스 보병은 선발에대 합류할 시간을 벌었고 

이제 알렉산더는 본 전투를 목전에 두고 상대편 진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인도 군 선봉엔 그들이 자랑하는 200마리의 숙련된 전투 코끼리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30,000여 명의 보병이 탄탄히 받쳐 주었고 양익엔 각 1,000명의 기병이 측면을 사수했다

 

이를 지켜본 알렉산더는 아군보다 우세한 적의 보병진에 전투의 양상이 기병전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적 선봉의 코끼리 부대 탓에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마의 역사가 카티어스(Catius)는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 무장한 병사들 사이의 야수들은 멀리서 보면 마치 탑처럼 보였다.

포러스는 올라탄 야수 높이까지 더해져 인간의 신장을 훌쩍 넘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

 

사실 페르시아를 정복하며 이따금씩 코끼리 부대를 마주쳐 본 그리스 군이었지만 이토록 대규모의 부대는 그들도 처음이었다

더욱이 병사들은 딱히 문제가 없었지만 말이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코끼리들의 냄새, 소리, 모습

이 모든 것들은 마케도니아(Macedonia) 말들에게 경악스럽기 그지없었고 말 그대로 패닉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 기병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선 전술 수정이 필요했다

 

 

우선 알렉산더는 4,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적진의 좌측으로 향했다

그리고 인도 군은 앞서 진영을 살펴 보았듯 양익 1,000명 씩 총 2,000명의 기병이 전부였기에 

이를 본 포러스는 즉시 우측 측면의 기병들에게 뒤로 돌아 좌측을 지원하라 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알렉산더가 이미 계산에 넣었던 부분이었다

 

 

이제 알렉산더는 좌측으로 함께 진군하던 코에누스(Coenus)에게 2,000명의 기병을 떼어주며 방향을 바꿔 수비가 없는 우측으로 향하라 명령했다

그리고 이 병력은 이내 인도 전군의 뒤를 가로질러 내달리기 시작한다

 

한편 이들에게 향할 인도 군의 공세를 막기위해 알렉산더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데 다시 기병 궁사로 하여금 적들의 시선을 끌게 한 것이었다

 

 

자 당시 전장의 상황을 Richard Gabriel과 함께 세세히 뜯어보자

 

" 누구라도 포러스처럼 좌익을 보강하려 했을 겁니다.

그리고 혹여나 포위되는 것을 우려해 좌익의 군사들을 더욱 왼쪽으로 이동시키며 전선을 넓혔겠죠.

 

하지만 알렉산더는 수 위의 수를 보는 자였습니다.

그는 그대로 휘하 2,000명의 중기병을 거느리고 포러스 본군의 좌측 대신 더 안쪽으로 파고들며 좌익의 기병을 강타해버렸습니다.

동시에 내내 적진의 뒤를 내리 달리던 코에누스의 기병대 역시 설상가상으로 포러스 좌익의 기병대를 후방에서 들이쳤습니다. "

 

 

 

" 결국 인도군 좌익의 기병대는 별다른 힘도 써보지 못하고 곧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알렉산더의 중기병대는 적진의 중심으로 침투했습니다.

 

하지만 포러스는 항복하려 하지 않았고 자랑하던 인도 궁사들에게 명해 보다 적극적인 공격을 하라 일렀습니다. "

 

 

당시 인도 군의 활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180cm에 달하는 대궁이었다

때문에 화살에 실린 막강한 위력은 어떤 방패도 뚫어낼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수준이었다

 

다만 위력만큼 활시위를 당기는데 드는 힘도 어마어마해서 인도 궁수들 대개는 활을 발로 바닥에 고정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전날 비가 내린 전장은 이미 수천 마리의 말과 코끼리들이 날뛰며 진창을 만들어 놓은 상태

덕분에 이들은 명성대로 위력을 발휘하긴 쉽지 않았다

 

 

바닥에 고정되지 않는 활들로부터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강력한 병기가 무용지물이 되었음을 깨달은 포러스는 이제 전세가 기운 것을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자 그럼 선봉에 섰던 코끼리 부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투 코끼리 부대 역시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진 못했다

사실 코끼리의 약점을 잘 알고있었던 그리스 군은 창과 화살 등으로 코끼리의 '눈'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나섰고

덕분에 녀석들은 미쳐 날뛰며 적군만큼 아군들에게도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이런 대혼란을 틈타 인도 군의 중심부를 강타한 알렉산더의 기병대는 적진을 마구 휘저었고 이내 포러스의 군은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Matthew Gonzales는 당시 전장을 '지옥'과도 같았을 것이라 예상한다

 

" 자 포러스의 인도 군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죠.

이미 중앙은 무너진지 오래입니다.

거기다 수만의 병사들, 나귀와 말의 울음소리가 뒤섞인 전장은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았을 것이며 이에 공포심은 극에 달했을 겁니다. "

 

 

" 도망이요?

도망도 갈 수가 있어야 가는 것이죠.

사실 이런 전투는 넓은 데서 벌어지면 그나마 사상자가 덜한 법인데 히다스페스 강 전투의 전장은 실상 좁은 편에 속했고

양측면에선 적의 기병대가 압박해오는 상황에 도망은 커녕 인도 군사들은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아! 그리고 냄새도 만만찮았을 거예요.

코끼리 역시 다른 동물들처럼 다치면 배변을 보다보니 전장의 바닥은 피와 살점, 배설물들로 가득차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을테죠. "

 

 

전투가 시작된 지 어느덧 7시간

포러스는 끝내 살아남았지만 인도 군은 거의 전멸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큰 부상을 입고도 용맹히 싸우는 포러스의 모습과 패배 앞애서도 굴하지 않는 그의 의지에 감동한다

 

비록 적이지만 깊은 감명을 준 자였기에 알렉산더는 이제 그에게 회합을 제안한다

역사학자들은 이 회합의 대화를 이렇게 기록했다

 

' 알렉산더가 먼저 말을 건냈다. 어떻게 해주길 바라나?

왕답게 예우해달라. 이것이 포러스의 대답이었다. '

 

그의 위엄과 자태에 재차 감명을 받은 알렉산더는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었고 왕으로서의 영토와 통치권을 지켜주기로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알렉산더는 히다스페스 강 전투에서 천재적인 전략을 보여주었다

훗날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이 '전장을 읽을 줄 알아서 눈만을 적을 공격한다' 며 그를 극찬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다만 이 전투를 계기로 드디어 인도 국경에 첫 발을 내딛은 알렉산더에게 더 이상의 큰 승리는 없었다

이 의기양양한 침입자에 대항하기 위해 인도의 수많은 왕들이 연합을 이루었고 그들은 곧 30만 대군으로 그의 그리스 군을 몰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인도원정을 나서며 알렉산더를 믿고 따랐던 여러 신하들조차 길고 고된 전쟁에 회군을 간언했고

또 오랫동안 본국에 자리를 비운 탓에 정복한 지역들에게 반란의 조짐도 보이자 알렉산더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현재의 이라크인 바빌론(Babylon)으로 발을 돌린다

 

 

 

알렉산더 죽음의 원인에 대해선 이런저런 설들이 많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그가 동방원정을 계기로 바빌론에서 말라리아를 얻어 죽었다고 추측한다

 

사후 파라오이기도 했던 알렉산더는 이집트로 보내져 미라가 되어 수정 관에 안치되었는데 

그의 나이 33세의 일이었다

 

 

위대한 정복자로서 그가 보여준 놀라운 군 통솔력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군사전문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실제로 1991년 1차 걸프전에서 노만 슈와츠코프(Norman Schwarzkopf) 장군은 알렉산더의 좌측 기습작전을 전투에 활용했고

쿠웨이트(Kuwait)에 주둔하고 있던 이라크 군의 주병력을 속이는데 성공한 바 있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된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은 효과적인 포위전술로 승리를 거두며 총 100시간을 넘기기 전에 끝이 났다

 

 

 

알렉산더는 자기가 구상한 전력을 대부분 성공시키며 군을 승리로 이끌어왔다

하지만 그는 그에 만족하지 않았고 계속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이는 아마도 호기심이 굉장히 많았거나, 전통적 그리스 인들의 습성처럼 정치적 목적이 아닌 단순 명예와 개인적 영광을 위해 싸웠기 때문은 아닐까? 

 

어찌되었건 그의 명성은 먼 미래에도 끊이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될 것이며

우리의 기억 속에 알렉산더는 잊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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