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상이 "신립은 어찌하여 패했는가?" 하고 물으니,

 

선전관 민종신이 아뢰기를, "새재(烏嶺)를 미처 지키지 못하였다가 적이 새재를 넘어와 밤중에 돌격하였으므로 패배한 것입니다."

 

- 선조실록(선조 25년 5월 10일)

 

 

  

 

"신립은 원래 날쌔고 용감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전투의 계책에는 원래 부족한 인물이었다." - 류성룡, 징비록

 

 

   

 

 

"신립을 일으켜 얘기나 좀 해봤으면, 어찌하여 을 열어 적을 받아들였는지?" - 정약용, 탄금대를 지나며

 

 

 

 

"이런 천혜의 요지를 두고도 지킬 줄 몰랐으니, 신립은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다." - 이여송, 선조수정실록(선조 25년 4월 1일)

 

 

 

 

고니시 유키나가를 위시한 왜군 선봉대가 부산과 동래 일대를 함락시키고 빠른 속도로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에 조정은 방어전략을 구상한다.

 

이 과정에서 한성 판윤(서울시장) 직을 맡고 있던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이 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왜군을 막기 위해 충주 일대로 나아간다.

 

충주로 나아간 신립과 부장들은 전술을 상의하는데, 김여물을 비롯한 부장들 대다수가 험한 문경새재(조령)를 끼고 항전할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도순변사 신립은 부장들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서 결전을 벌여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고, 결국 조선군은 탄금대로 향했다.

 

탄금대는 소백산맥에 위치한 문경새재와 달리 비교적으로 평지에 가까운 곳이었다. 신립은 이 곳의 강을 등지는 배수진을 펼쳤다.

 

하지만 논밭을 비롯한 농로가 산재해있는 탄금대는 땅이 질척하여 조선군의 주력인 기병이 기동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운 지역이었고,

 

전쟁으로 인해 급히 소집된 비정규군이 다수인 조선군은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참패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신립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후 신립의 패전 소식은 한양으로 날아들어 민심을 동요케 하였으며, 조정은 북쪽으로 파천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어지고 말았다.

 

임금은 물론 조정에서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손 꼽혔던 신립. 임금이 직접 보검을 하사하며 전권을 부여했던 신립은 왜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

 

 

왜 그는 험한 조령이 아니라 평야 탄금대를 선택한 것일까? 탄금대가 아닌 조령으로 갔다면 승산은 있었을까?

 

이번 글은 이 탄금대 전투에 대한 것이다.

 

 

 

당시 왜군이 경상도 일대에서 한양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위 사진의 소백산맥을 어떻게든 넘어서야만 했다.

 

그 중에서도 문경새재(조령)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제 1 선봉대가 머물러 있는 상주에서 충주로 갈 수 있는 최단코스였다.

 

하지만 문경새재는 최단코스라는 메리트가 있을 뿐, 한양 일대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었다.

 

 

 

이는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를 정리한 글인데, 탄금대 전투가 일어난 충주로 진격한 군세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1부대와 가토 기요마사의 2부대였다.

 

그 외에 김천에서 청주 방면으로 나아간 부대도 있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3부대였다. 이들은 추풍령을 통해 한양 일대로 진격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소백산맥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조령만이 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추풍령과 죽령이라는 차선책도 존재했다.

 

당시 왜군의 1 부대는 조령으로, 2 부대는 죽령으로, 3 부대는 추풍령으로 넘어가려고 계획되어 있었으나 수정되어 가토가 조령으로 넘어간 것이다.

 

 

 

만약 신립의 조선군이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문경새재에 자리를 잡았다 하더라도, 왜군의 입장에서는 추풍령과 죽령을 통해 넘어가면 그만이다.

 

아니면 일본군이 신립을 의식하여 원 계획대로 추풍령-문경새재-죽령 일대로 동시에 진격하여 신립 군대를 포위 섬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형적으로는 탄금대에 비해 문경새재가 더 방어에 용이한 곳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당시 정황으로 볼 때 문경새재는 절대 유리한 고지가 아니었다.

 

조령 일대에 신립 군대가 고립된다면 병사들의 사기는 요동칠 것이며 보급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인데 앉아서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다.

 

 

또한, 조령에는 문경새재 외에도 많은 길이 존재하였다. 큰재, 작은재, 하늘재 등이 그것이다.

 

기초적인 군사 훈련 조차 받지 못한 농민들을 대부분 거느린 신립이 조령에 진을 쳤다 하더라도 이 많은 통로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는 게 가능할까?

 

통솔은 커녕 전투 조차 치루지 못하는 병사들을 분산 배치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탈영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차라리 당시 신립의 주장대로, 신립이 보유하고 있었던 정예 기병 2천여 기를 적극 활용하여 방어전에 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탄금대에 진을 친다면 기병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물론, 병력을 한 곳에 집중시켜 통솔력과 전투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령이 탄금대보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역이라고 볼 수 없으며, 탄금대에 진을 치는 것이 오히려 더 전략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덧붙여.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 부분을 보면, 애초에 조선의 동원체계는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신립 조차도 군대가 얼마 없었을 뿐더러

 

더 이상 동원될만한 사람도 없었기에 신립이 탄금대에 진을 치든, 조령에 진을 치든 그로 인해 벌어진 시간을 활용할 능력은 조선에게 없었다.

 

신립이 하루를 벌든 사흘을 벌든 조선에서는 어찌 손 쓸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신립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으며, 조선의 앞날도 예정돼 있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