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왕인 아버지에게 죽은 비운의 왕자  복성군

복성군은 1509년 중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아쉽게도 어머니는 정비가 아닌 당시 숙의였던 박씨였다. 

2000년대 초반 뭬야~? 의 유행어의 주인공 경빈박씨 되시겠다. 

후궁에게 태어날때부터 그의 운은 이미 틀어져 있었다. 

그러나 박씨도 그녀의 뒷배는 양아버지이자 중종반정 공신 원탑 평성부원군 박원종이었다.

흔히들 경빈박씨가 박원종의 양녀로 알려져 있는데, 경빈박씨는 실록에는 박수림(朴秀林)의 딸로 나오는데 밀양박씨임 박원종이 양녀로 입양했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중종 2권, 2년(1507 3월 18일) 4번째기사-

하지만, 백과사전 및 각종 기사에선 여전히 박원종의 양녀로 나온다.

그녀는 중전이었던 장경왕후보다 중종의 총애를 더 한몸에 받고 있었다.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엔 단 한명의 소생도 없었던 반면,

숙의박씨(경빈박씨)는 복성군 이후에도 1512년 혜순옹주 1514년 혜정옹주 두 공주까지 연거푸 낳으면서 박씨는 장경왕후를 제치고 중종의 총애를 독차지 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복성군의 원자책봉은 거의 확정된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둘 모자에게 청천벽력의 소식이 날아오게 된다.

"원자마마 탄생이요!"

장경왕후가 드디어 아들을 낳은 것이다.(훗날의 인종.)

원자탄생 소식은 그야말로 복성군 모자에겐 날벼락같은 소식이었다.

어린 복성군이 뭘 알았겠냐만, 그는 왕위 계승서열 1위에서 순식간에 서자로, 즉 첩의 자식으로 추락해버렸다.

하지만 장경왕후가 아들을 낳은지 6일만에 사망하여, 중전의 자리가 공석이 되어 버렸다.

-중종 21권, 10년(1515  3월 2일) 1번째기사-
삼경 오점에 중궁이 승하하다.

이후 공석이 된 중궁전의 안주인을 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리게 된다.

 -중종 23권, 10년(1515 10월 3일) 2번째기사-
유순·정광필 등이 중전을 정하는 것과 원자의 교육에 대해 논의하다.

만약에 후궁 중에서 간택하자면 중전의 자리는 왕의 장자 복성군의 어머니이자, 중종의 총애를 독차지 하던 박씨가 유력했지만, 당시 그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녀의 뒷배이었던 양아버지 박원종은 이미 5년전인 1510년에 세상을 떠난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녀의 출신이 발목을 잡았는데 그녀는 연산군 집권 말기에 흥청 소속 궁녀였었다.

"연산군11년 채홍의 일 때문에 비로소 그 집에 아름다운 처녀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리하여 반정(反正)한 처음에 추천되어 궁중(宮中)에 들어왔는데 이 여인이 바로 경빈(敬嬪)이다. "

-중종 58권, 22년(1527 4월 26일) 1번째기사-

이러한 약점들로 그녀는 결국 신료들의 맹공을 당하게 되고, 신료들 역시 어린 원자의 안전을 위해 대놓고 박씨는 안된다고 반대하기에 이른다.

"상께서 내정(內政)을 워낙 우연하게 하지 않으시니 어찌 그러한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어서 중궁이 되신 분이 만약에 ‘이는 내 소생이고 저는 남의 소생이다.’라고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이런 생각이 싹트게 되면 일이 크게 어그러질 것입니다."

-중종 23권, 10년(1515 10월 3일) 2번째기사 中-

결국 그녀는 신하들의 반대로 중전에 오르지 못하였다.

숙의박씨가 후궁 가운데에서 총애가 으뜸이었으므로, 장경(章敬)의 예를 따라 스스로 중위(中位)에 오르고자 하였었다. 상도 이것을 들으려 하였으나 (중략) 정광필만이 분연히 허락하지 않으며 아뢰기를 정위(正位)는 마땅히 숙덕(淑德)이 있는 명문(名門)에서 다시 구해야 할 것이요 미천한 출신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박씨의 뜻은 마침내 저지되고 상의 뜻도 새 왕비를 맞기로 결정되었다.

-중종 28권, 12년(1517  7월 22일) 12번째기사 사신의 논평 中-

박원종이 살아 있더라도 장경왕후조차 그 박원종의 외조카였기 때문에 아마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중종의 부인 단경왕후 신씨가 폐비되었을 때, 장경왕후도 후궁이었는데 당시 숙의였던 박씨를 제치고 중전자리를 차지했었다. 그리고, 이때, 박원종이 장경왕후를 적극 지원했었다.

래서 경빈박씨가 박원종의 수양딸이 아니라는 설이 더 설득력을 얻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결국 새 중전으로 명문 파평윤씨 윤지임의 딸이 새로 중전이 되었다. 

-중종 27권, 12년(1517 3월 15일) 3번째기사-
예조에 전교하여 윤지임의 딸을 왕비로 결정하였으니, 권정례를 하도록 명하다.

이것조차도 중종의 어머니인 자순대비 윤씨(파평윤씨)와 죽은 장경왕후의 오빠였던 윤임의 입김이 있었다.

그래서 박씨는 죽었다 깨어나도 왕비가 될수 없었다.

게다가 새 중전인 문정왕후는 원자의 생모인 장경왕후와 9촌간이었음에, 당시 3살배기였던 원자를 보호하고자 했던 왕실의 의지를 알수 있다.

그래도 중종은 내심 박씨에게 미안했는지 내명부 직첩을 종2품 숙의에서 정 1품 경빈으로 승급시켜준다.

결국 이렇게 어머니 덕분에 복성군은 왕위계승 유력 후보에서 확정적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문정왕후가 입궐 초 중종과의 회임(임신)에 실패하,고 4년만에 출산하는데 1521년 의혜공주, 1522년 효순공주, 그리고 1530년 경현공주까지 줄줄이 공주들만 생산하는 바람에 문정왕후는 중종의 총애를 잃게 된다.

이는 경빈박씨에게 더도 없는 기회였다.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그녀는 왕의 장자 복성군의 생모였으니까 행여 원자가 죽거나 중전이 중종의 미움이라도 받는 날엔 중전의 자리는 그녀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복성군은 서자라 해도 왕의 장자였어. 중종이 친히 교육에 힘쓰라고 전교까지 내릴 정도였다.

경연에서 아뢴 대로 왕자군의 사부(師傅)를 차정(差定)함이 합당할 듯하다. 또 학업은 그저 배우게만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예법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니, 지금 왕자군의 사부들 중에 학행이 있는 사람을 가려 항시 복성군의 처소에 가서 가르치되, 아울러 예법또한 가르치도록 하라.”

-중종 26권, 11년(1516 11월 15일) 5번째기사-
왕자군의 사부를 차정하도록 전교하다

이런고로 그녀는 내심 중전의 자리와 아들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고, 심정 등 훈구파 세력들과 긴밀히 협조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 야심은 결국 둘을 죽음으로 내몰게 만든다.

김안로, 그는 조광조 계열 사림파출신으로 기묘사화때 귀향갔다가 복직했는데, 심정 등 훈구파들의 미움을 받아 요직에 오르지 못하고 한직에 전전하고 있었다.

마침 그의 아들인 김희가 중종과 장경왕후의 소생인 효혜공주의 남편으로 간택된며 왕실과 인척관계가 된다.

그리고 조광조를 내친 중종은 김안로를 대안으로 지목한다.

앞으로 원자의 앞날을 위해서 윤임과 김안로 등으로 조직된 강력한 후원세력을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중종의 비호 아래 그는 원로대신 이장곤과 김세필 등을 밀어버리고 경명군, 이성군 등 왕족들까지 차례로 박살내 버린다. 이렇게 왕의 비호 아래 권력을 휘두를려는 찰나,

그때 위기감을 느낀 심정, 이항 등 훈구파들이 김안로를 줄기차게 견제하기 시작하며 그를 탄핵하였다.

게다가 영의정 남곤 등 삼정승까지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종도 처음에는 신료들의 탄핵요청을 듣지 않다가 홍문관 삼사 등 계속되는 탄핵 상소문에 지쳐 결국 김안로를 귀양을 보내 버린다.

"두고보자."

심정, 이항 등 훈구대신들에 의해 귀양살이를 하게 된 김안로는 훈구파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무서운 계획을 꾸미게 된다.

왕의 사위이자 자신의 아들 김회를 시켜 쥐를 잡는다. 그리고는 입, 눈, 귀를 불로 지져서 세자의 거처인 동궁에 메달아 놓게 하였고 세자를 저주하는 글귀를 쓰도록 시킨다.

이른바 복성군 두 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작서의 변' 사건의 시작이다.

하필 세자의 생일 중 발생한 해괴망측한 사건으로 궁이 발칵 뒤집힌다. 

당시 세자는 돼지띠였는데 쥐의 눈과 코를 불로 지져서 돼지의 형상으로 만들고 부근에서 세자의 생년 월일이 적힌 저주글까지 발견되어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중종 58권, 22년(1527 3월 22일) 1번째기사-
대신들이 면대를 청하여 세자의 침실에 쥐를 매달아 양법한 사람을 죄줄 것을 청하다.

당연하게도 범인으로 지목되는게 경빈박씨와 복성군 모자였다. 

세자가 없어지면 자연스레 그들이 반사이익을 보게 되니 말이다. 

경빈박씨와 복성군에게는 억울한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 둘에게 너무나 억울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때 복성군의 시종이 살인사건에 연루되었다.

"쌀을 훔친 일 때문에 주인에게 매를 맞은 천비가 화가 나서 샘에 빠졌다.’고 하여 사상(事狀)이 명백하다. 그리고 복성군의 비자는 형조가 잡아다가 추문하고 있지만 나인은 내관(內官)에게 공함을 내어 묻도록 하라.”

-중종 58권, 22년(1527 4월 4일) 6번째기사-
형조 판서 한형윤 등이 샘에 빠져 죽은 천비의 처리를 여쭈다.

신하들의 요청을 버티지 못하고 중종이 허락하에 경빈의 시녀들을 고문하였고, 고문에 못이긴 시녀들은 결국 거짓 실토를 하였다.

게다가 경빈의 딸인 혜정옹주까지 뜬금없이 이 일에 연루되어 그녀의 시녀들까지 고문받기에 이른다.

또한 경빈박씨의 둘째사위인 홍여 또한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그 역시 세자를 저주하는 글을 자기가 썼다고 거짓 자백을 하게 되고 고문으로 죽고 만다.

하지만 중종 그도 한 사람의 지아비였고, 한 사람의 아버지 였을까?

중종은 경빈박씨를 보호한다.

"경빈은 장경왕후가 아들이 없을 때 복성군을 처음 낳았는데, 복성군이 어릴 적에 장경왕후가 그를 친자식처럼 돌보았었다. 그래서 장경왕후가 죽은 뒤에도 경빈이 후한 은혜를 잊지 못해 손수 갓[笠]의 수식을 만들어 세자에게 주었던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고 나도 아는 일이다. "

-중종 58권, 22년(1527 4월 3일) 2번째기사 中-
세자에 대한 양법 범인을 색출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대신들과 상의하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첩에게서 난 아들은 취급받지 못하던 나라였으며, 게다가 조사과정에서 복성군 모자에 대한 불리한 각종 증언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고, 신하들의 주청에 의해 결국 두 모자는 귀양가고 딸들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 또한 폐서인 당해 쫒겨난다.

결국 훈구파의 세력약화를 위한 정치모략에 복성군 모자들만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중종 58권, 22년(1527 4월 21일(정묘) 2번째기사-
대신의 의논에 따라 박빈을 폐하고 복성군의 작호를 삭탈하다.

훈구 세력의 안방마님인 경빈박씨 몰아내는데 성공한 김안로는 이무렵 조용히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는 그의 며느리였던 효혜공주와 정치 동료였던 윤임 덕분이었는데, 정계에 복귀하자마자 권력 굳히기에 들어간다.

자신을 모함했던 훈구파의 거물 심정에게 경빈박씨와 통간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더불어 이항도 같이 보내버린다.

역설적이게도 복성군 모자를 몰아내는데 크게 기여했던 인물들인데 말이다.

결국 김안로의 각본에 둘이 놀아나다 죽게 된다.

김안로가 심정과 경빈박씨를 간통했다고 엮어버린 것은 결국 중종이 박씨를 죽이는데 결정적 이유가 된다. 

그리고 복성군 모자 사사에 반대하던 중종의 마지막 충신 정광필(훈구세력 아니었다.)도 실각시켜 버린다. 이제 그야말로 천하는 김안로의 세상이었다.

결국 쫒겨났던 불쌍한 두 모자는 결국 사약을 받고 죽는다. 

어머니인 경빈박씨가 사약을 먹고 먼저 죽는다.

-중종 74권, 28년(1533 5월 23일) 2번째기사-
복성군을 안치하고 박씨의 사사를 명하다.

그리고 복성군도 곧이어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복성군에게는 사약을 내리라. 두 옹주는 폐서인하고, 김인경(첫째사위)은 먼 변방에 귀양보내라."

 -중종 74권, 28년(1533  5월 26일(무진) 5번째기사-

 

왕의 서장자 복성군은 이렇게 허무하게 숨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작서의 변은 복성군 모자가 꾸민일이 아니라는 의혹이 점점 제기된다.

복성군 모자가 사약을 받기 전에 이종익이 김희가 범인이라 지목하는 상소문을 보면,

김안로의 아들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 양송(梁松)보다도 더 간사한 인물로 죄악이 너무 심하여 하늘의 베임을 받았습니다. 전일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나자 전하와 조정이 누구의 소행임을 알지 못하여 끝까지 힐문(詰問)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많은 궁중의 사람들이 원통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는 김희가 사심(私心)을 일으켜 요사(妖邪)를 부린 소치(所致)에 불과하며,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 죄를 받은 것입니다.

-중종 72권, 27년(1532  3월 20일) 1번째기사-
김안로를 배척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밝힌 이종익의 옥중 상소

하지만 당시 김안로의 권력이 너무 막강하여 이 상소문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고, 복성군 모자는 죽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복성군 모자가 죽은지 2~3달 후 전날 사건때의 같은 필체로 적힌 저주글과 인형이 궁궐에서 발견되었다.

대간청 중문 안 건너편 헛간 벽 위에 무슨 패가 걸려 있다. 하기에 신들이 놀라서 나가 보았더니, 패 곁에 또 흰 물건이 있었는데, 볏짚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백지를 발라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패의 한면에는 전번 동궁에 걸렸던 패에 쓰인 글씨와 같고.......

중종 75권, 28년(1533 7월 20일) 3번째기사
대간청 중문안 헛간 벽에 패가 걸리다.

“그 패를 보면 만든 형태가 전번 것과 같습니다.다른 사람이라면 천금을 준다 해도 어찌 썼겠습니까?"  - 상진

"신들이 보았더니, 전일 동궁에 걸린 것과 같았습니다." -채무택

"패를 전일의 패와 비교해 볼 때 한두 글자를 바꾸어 썼을 뿐이니, 같은 무리의 손에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임붕

중종 75권, 28년(1533  7월 20일) 5번째기사 中 
사정전에서 정광필·장순손 등이 패의 서체에 대해 논의하다. 

 지금 그 서체를 보니 전의 익숙한 글씨만은 못합니다. 보통 사람의 글씨는 대개 같기 때문에 진실로 분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김안로-

당시 대다수가 전 사건과 똑같다는 필체에 대해서 김안로는 애매한 발언을 한다.

결국  김안로가 죽은 이후에야 복성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다.

작서의 변은 용서할 수는 없다지만 저주한 사실은 밝히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복성군이 한집안에서 저주한 일에 참여했는지는 신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세자의 뒷날을 위하여서라고 하면서 전하의 총애하는 첩과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쫓아내거나 죽이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고 말하나 신은 의혹이 더욱 깊습니다.

-중종 91권, 34년(1539 7월 5일) 1번째기사 이약빙의 상소문 中-

전자에 복성군 이미(李嵋)가 사사 된 것에 대해 지금까지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리고 박씨가 범했다는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설사 죄가 있다 하더라도 아들과 함께 꾀한 형적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중략) 즉위하신 이후로 성덕에 누됨이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중종 100권, 38년(1543 1월 19일) 1번째기사-
이언적이 석강에서 천재지변과 복성군의 사사 문제를 아뢰다.

지난번 이미(李嵋-복성군)의 일을, 신은 어려서 그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화의 참혹함은 차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요망한 일을 비록 박씨가 했다고는 하지만 그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먼 지방으로 귀양보낸 것도 지나친 일인데, 그 뒤에 또 다시 큰 옥사가 일어나 모자가 연이어 죽고, 홍여도 형장 아래서 죽었으니 이토록 극심한 변고는 전고에 드문 일입니다. 형제간이 된 사람의 정으로서 어떠하겠습니까.

 당시 사건 당사자이자 피해자였던 세자까지 나서서 자신의 이복형제 복성군을 변호했다.

-중종 96권, 36년(1541 11월 9일) 3번째기사-
속적에서 제외된 이미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동궁의 상소 (中)
  

“복성군의 속적을 회복시켜 직첩을 돌려 주고, 김인경(혜순옹주 남편)도 직첩을 주어 서용(敍用)하라.”

세자의 진심어린 호소에 중종은 결국 복성군 모자를 복위시켜 주기로 한다.

이렇게 복성군모자는 다시 명예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죽은 이들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중종의 빈 박씨는 복성군 이미의 어머니인데, 김안로 인종을 보좌한다며 불안 요소를 정리한다는 구실로 권력을 잡고 자기에게 빌붙지 않은 사대부들을 해쳤다. 이에 박씨가 동궁을 저주했다고 무고하여 마침내 복성군 홍여 다 피해를 당하고 빈은 내쫓겨 끝내 사사되어 김안로가 패망한 뒤에도 사람들이 그 억울함을 밝히지 못하였다.

-선조수정실록 5권, 4년(1571 8월 1일) 3번째기사 中-

사신은 논한다. 인자하고 공검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중략) 박빈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과 사위(홍여)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가 어그러졌고 (중략)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중종 105권, 39년(1544 11월 15일) 12번째기사-

이런 중종이 얼마나 답답했었던지 중종이 죽자 사관이 신랄하게 비판한다.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을 당해서 일까?

복성군의 원혼에 대한 야사가 하나 전해진다. 

때는 이항복이 젊은 시절, 어느날 이웃집에 사는 소녀 무당이 나타나 자신에게 씌운 영가가 이항복을 만나고 싶어한다며 모시고 오겠다는 것이 아닌가? 

소녀의 뒤에는 한 젊은이가 서있었다. 

영가는 "나는 왕자 복성군이오."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선 설움이 복받친 듯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원통하게 근거 없는 죄로 죽게 되어 저 세상에서도 한이 맺혀 있었소. 때문에 후대에 나에 대한 경위를 묻고자 하였으나 모두 혼백이 약하여 능히 나를 만나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답답해하던 차 그대는 비록 나이는 어리나 기백이 대단하고 말에 신의가 있는 것 같아 무당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나타난 것이오." 

 "두 분이 억울한 누명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 온데 어찌 아직까지 듣지 못하셨는지요?"

 이항복은 이에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죄없이 죽어간 경빈 박씨와 복성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설명했고 그제서야 복성군은 말없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말했다. 

 "그대는 신의있는 사람이니 거짓이 아니라는 믿음이 가오. 참으로 그러하다면 아홉 번을 죽는다하더라도 한이 없소이다."

복성군은 이항복에게 고마워하며 무당소녀를 시켜 그에게 여러 과일을 가득 전해주었다.  그리고 문을 나서는데 이항복이 배웅하러 나가자 복성군의 영혼은 몇 발자국 가더니 스르르 그 자태마저 사라지더라는 것.

무당 소녀 역시 이항복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복성군의 영가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그와의 만남을 증명할만한 것은 방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과일 쟁반 뿐이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