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대승, 용문산 전투
오른팔에 총을 맞으면 왼손으로 당기고
두 팔을 다 못쓰게 되면 이로 수류탄의 핀을 뽑아 발로 차 굴렸습니다.
용문산 전투에 참가했던 우리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결사항전 하였습니다.
(제 6 보병사단 2연대 참전자 회고록)
때는 1951년 5월.
춘계 대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지속적으로 압박하던 서부전선을 교착상태로 두고 동부전선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들어온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이번 글의 배경인 경기도 양평 용문산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중공군이 동부전선 중에서도 용문산을 택한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어.
춘천, 화천, 양구로 이어지는 북한강과 여주 충주로 이어지는 남한강의 뱃길과
홍천, 인제, 횡성, 원주 등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육상 교통의 요지였으며
한달전 사창리에서 좆나게 줘패 털어버린 6사단이 방어를 담당하는 구역이였지.
※사창리 전투
1951년 4월 21일
사창리에 주둔 중이던 6사단을 중공군이 기습공격하여 2일만에 34km나 밀린 6사단 치욕의 패전.
사단 병력의 50%가 사망, 실종, 포로로 잡혔으며 사단 화기역시 대부분 잃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사에 길이남을 3대 패전인 현리 전투는 추후에...
시작된 전투.
이름은 용문산 전투로 명명되었지만 실제로 전투가 일어난 곳은
용문산이 아니라 북한강과 427고지 사이였어.
6사단은 예하 3개의 연대 중 2연대를 북한강 라인을 따라 전초기지로 주둔시켰으며
7연대와 19연대를 용문산 주 저항선에 배치시켜 군사 요충지를 방어코자 하였음.
2연대의 1대대는 북한강 바로 남쪽의 559고지, 2대대는 381고지, 3대대는
연대 예비 대대 임무를 맡아 두 대대보다 약깐 남쪽에 있는 353고지에 산개하여 있었음.
육군 제 6 보병사단 병사들.
5월 17일 전투 준비를 마친 중공군은 5월 18일에 대대적인 공세에 돌입했는데
중공군에 맞서 2연대 1대대와 2대대는 중공군의 북한강 도하를 최대한 지연시키며 차례로 철수하며
1대대는 581고지(나산) 2대대는 427고지에서 방어 준비를 함.
도하가 끝난 중공군은 신나게 남하를 하기 시작했고 2연대의 예하 대대들은 각 임무를 맡은 고지에서
중공군을 막았지만 수적열세로 결국 1대대와 3대대는 427고지에 있는 2대대로 철수하였고
2연대, 1,2,3대대가 한곳에 모여 연대 사주방어 진지를 구축하여 결사항전으로 전투에 들어가.
근데 이게 잘못된게 뭐냐면 앞서 말했듯 2연대는 전초기지 역할을 띄고 있는데
얘네들이 박살나면 전선이 용문산 주저항선으로 퇴각하여 예비연대로 임무가 변환되고
7연대와 19연대가 주력 부대로써 전투에 들어가야 정상인데
2연대는 황당하게도 퇴각없이 전멸을 각오한 결사항전에 돌입하지.
용문산 전투당시 부대 배치
수사불패 청성투혼
이 때쯤 되니까 중공군도 헷갈리기 시작해.
분명히 여기가 전초기지고 후방에 주 저항선이 있을텐데
2연대가 죽을 각오로 427고지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거야.
이 때 제 63군 중공 사령관은 이곳이 무너지면 용문산이 무너진다라는 판단을 하였고
187, 188 주력사단을 이 427고지에 들이민것도 모자라 예비사단인 189사단까지 추가 공세에 투입해.
한개의 연대가 무려 3개의 사단 병력을 상대로 무려 4일을 버텨.
2연대 장병들은 모두가 다같이 머리에 결사라는 띠를 두르고 식량도 물도 탄약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한체
사수명령 하나로 427고지에서 결사항전으로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어.
6사단으로 치자면 1:3의 병력 열세였고 2연대로만 치자면 1:9에 절대적인 열세였지.
미군도 용문산이 떨어지면 동서부 방어선이 무너저 일제 후퇴를 해야하기에
엄청난 포병화력으로 2연대를 지원해
그리고 때가 왔지.
2연대를 지원하는 미군의 175mm 포대
반격의 시작
넘어갈듯 하면서도 끝까지 버틴 2연대 뒤에선
7연대와 19연대가 무려 3일이나 전면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어.
그리고 5월 20일 새벽 5시를 기해 역습에 돌입해
2연대와 3일동안 미친듯이 싸워 지쳐있는 중공군 3개 사단의 옆구리에 기습!
427고지에 몰려있는 2연대와 중공군 3개 사단이 정신이 없을 무렵
7연대는 427고지를 좌회하여
19연대는 427고지를 우회하여 후방 급습을 하게 되지.
427 고지가 주 방어선이고 사단 병력이 모두 모여있는 줄 알았던 중공군은
당황을 하게 되고 여기서부터 전설이 시작.
포위될 것을 우려한 종공군이 21일 새벽 북한강을 다시 도하하여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에 6사단은 모든 예비 병력까지 동원한 총공격을 하게되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한 6사단은 양평을 지나 가평,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무려 60km를 진격하며
한달전 사창리 전투의 패배를 깨끗이 설욕하는데 성공해.
화천까지 밀린 중공군 3개 사단은 화천호라는 배수의 진을 치지만 이곳에서
잔존한 3개 사단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전멸하게되
이승만 대통령은 이 승리를 기념하며 화천호의 이름을 파로호로 명명한다.
용문산 승전을 기념하는 6사단 2연대 1대대 중화기소대 장병들의 기념사진
닷새간의 전투 결과
국군
전사 - 107명, 부상 - 494명, 실종 - 33명
중공군
전사 - 17,177명, 포로 - 2,183명
2연대에 공격을 가했던 중공군의 3개 사단은 중공군 제 63군의 절반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야.
6사단의 용문산 수성은 단순히 용문산을 방어했다는 전술 승리가 아닌
중부전선을 절단낼 목적으로 총공격을 가해온 중공군을 막아냄으로써
수도권에 미칠 위협을 사전에 차단했으며 신뢰가 땅가지 떨어진 국군의 위상을 회복한 중요한 전투야.
용문산 전투 이 후 후퇴하는 중공군을 쫒아 24일부터 30일까지 전개된 총 반격작전에
중공군은 1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과 주요 물자를 망실하였으며 이후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르지.
이 대승을 기념하고자 아직도 6사단 2연대는 '용문산 부대' 라고 이름을 명명하여 승리를 기념하고 있어.
용문산 지구 전적비
(경기도 양편군 용문면 신점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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