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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최대 반란, 삼번의난(1편) : https://peacefulbreak.tistory.com/40

 

오삼계의 궐기는 천하를 진동시킨다.

그만큼 오삼계가 쌓은 명성은 거대했고 청조 입장에선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그게 악명이었든 어쨌든간에 말이다.

 

 

순무 - 황제직속의 지방관 관리의 감사권과 재정권 직속의 군사권 또한 가짐

총독 - 사실상 그 지방의 지도자 행정 군사 사법 재정에 대한 결정권을 가짐

 

오삼계가 직접 귀주를 거쳐 호남과 호북으로 진군하니 호남성은 오삼계의 손에 떨어졌고 사천성에서도 오삼계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 사천순무 나삼과 사천총독 오지무가 오삼계에게 투항한다. 즉, 사천성마저 오삼계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천성을 통해 운남성으로 토벌할려던 강희제의 계획은 틀어지고 당분간은 오삼계를 상대로 수세적인 입장을 취할수밖에 없었다.

 

 

섬서(산시)성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중 하나다.

진나라의 수도인 시안(장안)이 있었고 한 중이라는 사천과 화북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 또한 여기에 있었다.

 

당시 사천의 총독은 왕보신이라는 자였는데 워낙 용맹하고 능력이 있어 강희제는 자신의 부황인 순치제가 쓰던 권총을 왕보신에게 줬고 오삼계 또한 왕보신을 극진히 대하는등 그동안 많은 공을 들였다.

 

강희제는 왕보신의 재능을 아껴 섬서의 총독으로 삼았지만 당시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과 왕보신이 불화를 일으키며 왕보신마저 오삼계에 호응하게 된다.

 

 

호남성, 강서성, 사천성, 섬서성이 오삼계의 세력안에 떨어졌고 특히 믿었던 섬서총독 왕보신의 배반은 큰 타격이었다.

강희제는 어떻게든 나머지 두번왕마저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마침내 1674년 3월 정남왕 경정충이 대만의 정경과 연합해 반란에 호응하면서 사태는 강희제가 예상한 것 이상 최악의 형태로 흘러가게 된다.

 

그나마 위안인건 상가희의 충성맹세였지만 강희제가 상지효를 후계자로 인정하면서 장남인 상지신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즉,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고 상지효를 죽이고 강희제에게 반기를 들게 되었다.

 

전황은 점점 악화되었지만 강희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선은 지지부진 했지만 침착하게 대응했고 배반한 부하 왕보신에게도 회유책을 멈추지 않았다.

 

강희제는 남부전선(장사지역)에 안친왕 악락, 강서전선엔 간친왕 나포, 복건전선엔 강친왕 걸서, 서부전선(섬서지역)에는 도해를 파견해 반란군에 대응한다.

 

서북전성에 파견된 인물인 도해는 냉정하며, 침착하고 지모가 있는 인물이라 섬서지역의 혼란을 수습하고 바닥을 치던 군기와 사기를 다 잡았다.

 

도해는 한중에서 오삼계의 반란군을 크게 격퇴하고 평량성에서 왕보신마저 격퇴 및 포위하고 직접 나서서 그의 투항을 받아낸다.

왕보신이 투항으로 혼란스러웠던 서북전역은 평정되어 갔다.

 

형주와 장사쪽 전선은 오삼계의 본대가 있어 전황이 매우 지지부진했다. 코끼리까지 동원해서 공격하는 오삼계의 강군에 관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서로 함부로 싸우기가 어려운 형국이었다.

 

강서쪽에 파견된 나포는 반란군에 제대로 싸우지 않고 항상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강희제를 분통터지게 했는데(삼번의 난 이후 준가르 정벌때는 강희제가 친정하게 된다.) 참을성에 한계가 온 강희제가 제대로 싸우지않으면 죄를 묻겠다고 하자 나포를 움직이는데 성공해 나포는 길안에서 오삼계의 수하 왕서를 포위하고 그의 항복을 받아내어 강서지역도 평정되기 시작했다.

 

경정충이 반란을 일으킨 복건지역 전선은 비교적 전황이 수월했는데 절강총독 이지방은 용맹한 사람이어서 강친왕 걸서와 연합하여 복건지역 반란군을 공격해 수차례 경정충의 군사들을 격퇴했다.

그러면서 강희제는 경정충에 대해서도 계속된 회유책을 구사하였으며, 전황이 불리해진 경정충은 1677년 강희제에게 항복하고 이렇게 복건전역은 수월하게 진압되게 된다.

 

이렇게 관군들의 승리가 계속되고 반란이 점차 평정되어 갈때쯤 상지신도 다시 강희제에게 항복을 요청하게 된다.

 

초반의 불리한 형세를 강희제는 자신의 생각대로 끌고가 마침내 역전시켰고 이제 강희제에게 남은적은 오삼계 하나뿐이었다.

 

 

1678년 3월 오삼계는 형양에서 황제를 칭하고 주를 건국했지만 최후의 발악에 불과했다.

오삼계는 여러 전선에서 벌어진 전투에 신경쓰기엔 나이가 많았고 전선 또한 고립되어 갔다.

 

오삼계는 더이상 과거의 천하를 호령하던 장군이 아니었고 20대의 강희제는 밤낮 쉬지않고 모든 전선을 지휘했고 대장군들을 적절히 통솔했다.

 

67세의 늙은몸은 과로와 스트레스를 이기지못하고 결국 즉위한지 5달만에 죽고 만다.

 

오삼계의 지위는 손자인 오세번이 이어 반란군을 이끌었지만 오삼계의 명성에 의지했던 반란군은 이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형주 장사전선을 지탱하기 힘들어진 오세번은 귀주로 철군하고 악락과 나포는 형주와 장사전역을 수복하게 된다.

 

 

 

오삼계 없는 반란군은 오합지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던 강희제는 각지에서 반란군에 대해 총공세를 시작했다.

 

관군은 남하하여 중경과 성도를 수복하여 사천지역을 평정하고, 또한 운남을 필두로 곤명까지 진군하여 최후의 저항을 하는 오세번을 패배시키고 곤명을 함락하게 된다.

오세번은 자살했고 오삼계는 부관참시 당한다. 또한 관대한 강희제였지만 오삼계의 일족은 몰살을 당하게 된다.

 

반면, 항복한 상지신은 상가희의 충정을 생각한 강희제의 배려로 능지형대신 자살을 명받았고 나머지 가족들에겐 죄를 묻지 않았다.

 

경정충은 강희제의 회유책으로 항복하긴 했지만 오삼계와 똑같은 배신자였기에 능지형을 당했으며, 머리는 효수당해 8년이나 끌었던 반란은 완전히 평정되고 삼번은 철폐당했다.

 

삼번의 난이 평정되자 신하들은 앞다투어 강희제를 칭송하고 존호를 올렸지만 강희제는 존호를 거절하고 오히려 자신의 오판으로 큰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을 반성하는 글을 쓰고 건청문 앞에서 대학사 레데훈이 모든 신하앞에서 글을 읽게끔 지시하며 스스로를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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