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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최대 반란, 삼번의난(2편) : https://peacefulbreak.tistory.com/41

 

오삼계

 

명말의 명장이었지만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청나라에 투항하게 된다.

도르곤과 힘을 합쳐 이자성을 멸망시키고 미얀마까지 쳐들어가서 남명의 마지막황제 영력제를 살해하고 남명의 잔당들을 소탕했으며, 공이 워낙 컸기에 평서왕으로 책봉된다.

 

삼번

 

평서왕 오삼계 - 현재 운남성

평남왕 상가희 - 현재 광동성

정남왕 경정충 - 현재 복건성

 

삼번에는 많은 군대들이 주둔했는데 순치제 시절에만해도 대만의 정성공이나 남방 소수민족들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이들의 자치권이 나름 묵인된 상태였다.

 

하지만 남방이 어느정도 평정되고 본토를 노리던 정성공이 실패하자 삼번은 엄청난 골치거리로 전락해버려 이들은 자기 영지에서 엄청난 수의 사병을 거느리고 황제처럼 군림했다. 따로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키기도 했고 막강한 경제력으로 중앙정계에 있는 많은 관료들을 포섭해 중앙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19살의 혈기왕성했던 강희제는 이런 삼번을 철번하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삼번의 영향력이 엄청나고 특히 오삼계의 위망이야 말할것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희제도 선뜻 손을 쓰기가 힘들었는데 강희제의 철번의지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상가희가 철번을 요청하고 낙향하겠다는 상소를 올리게 되면서 말이다.

 

상가희

 

상가희는 본래 요동사람으로 권력에 대한 욕심이 경정충이나 오삼계보다 적었다. 강희제의 심중을 읽었는지 아님 본인의 의지였는지 정확한건 알수없지만 그는 철번하고 요동으로 낙향하겠다는 상소를 올려 철번의지가 강했던 강희제는 상가희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철번상소를 받아들인다.

 

상가희의 이런 돌발행동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들은 나머지 두명의 번왕이었다. 경정충이나 오삼계는 철번할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는데 상가희가 철번상소를 올리니 가만히 있기도 애매해져 버린거지 두번째로 경정충이 철번상소를 올린다.

 

오삼계의 입장

 

두명의 번왕이 철번을 요청하니 오삼계 입장은 엄청 난처해진다. 가만히 있자니 불충하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생겼지만 철번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철번을 요청한다고 해도 강희제가 감히 받아들이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세력은 상가희나 경청충보다 훨씬 강대했고 청왕조 개국의 공으로 따져도 자신은 엄청났기 때문이다.

결국 오삼계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철번상소를 올리게된다.

 

강희제의 입장

 

강희제는 철번의지가 분명했지만 막상 이렇게 삼번의 모두 철번상소가 올라오니 일이 너무 잘풀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권신인 오배를 제거하고 황제로써 국정운영에 탄력을 받았을때니 자신감도 있었을거고 그리고 상가희, 경정충, 오삼계의 친족들을 볼모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철번을 결정한다고 해도 반란을 없을거라 확신했다

 

이런 강희제의 판단은 오판이었지만 결국 그는 철번을 결정해버린다.

 

오삼계의 궐기

 

강희제가 철번을 결정하자 오삼계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산해관을 열어 청나라에 항복하고 도르곤과 이자성, 그리고 남명정부까지 도벌했지만 이제는 낙향해 아무런 권세없는 늙은이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오삼계 부하들의 불만이 더 컸다. 한평생을 오삼계를 따르며 이제서야 얻은 부귀영화인데 오삼계가 권력을 잃어버리면 자신들의 부귀영화도 날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산해관에서 부터 오삼계만 따르며 충성했던 사람들로 강희제의 신하가 아닌 오삼계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나서서 오삼계의 반란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오삼계의 인생은 항상 극적이었다. 그는 명장이었지만 배신자였고 영웅이자 역적이었다.

분명한건 항상 그는 배신이든 싸움이든 자신의 의지대로 해왔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강희제와의 대결 또한 결심하게된다.

 

오삼계는 스스로 변발을 자르고 자신이 살해한 남명정부 마지막황제 영력제에게 제사를 지내며 눈물을 흘린다.

배만복명이라는 구호 아래 격문을 쓰고 순무 주국치를 죽여 청조에 반역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경정충과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과 호응을 하고 대만의 정경과도 내통한다.

이제 전중국은 삼번과 청조의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강희제 역시 혼란스러웠다. 설마 반란까지 일으키진 않을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많은 신하들이 오초칠국의 난에서 한경제가 조조를 죽여 반란의 명분을 약화시킨 사례를 들어 철번을 주장했던 신하들의 처벌을 요구한다.

하지만 강희제는 조조를 죽였지만 유비의 반란을 막을수 없었던 한경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삼번의 난에서도 강희제의 위대함이 잘나타나는부분은 그 누구에게도 반란에 대한 책임전가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는것은 자신의 오판이었고 철번또한 자신의 의지였다는걸 부정하지 않았다.

 

강희제 토오격문을 써 오삼계의 격문을 반박하고 그의 불충을 꼬집는다.

 

"그대가 명 황실의 부흥을 그리도 원한다면 옛날에 청이 산해관을 통해 중원에 진입했을때 어찌 명나라 황실의 후손을 옹립하라고 상소를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청이 천하를 통일하자 그대는 명나라 황실의 후손을 제거해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옛주인에 대한 충성인가? 또한 신하된 자로써 두 주인을 섬기고 모두 배반했는데 이를 도의라고 할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강희제는 다른 두번들의 볼모들을 죽이지 않았다.

상가희와 경정충에 대한 철번은 철회되었고, 반란에 가담했던 자들도 항복하면 용서해준다는 관대함을 내세웠다.

 

강희제가 그러거나 말거나 1674년초 오삼계는 호북과 호남으로 진격한다.

7년에 걸친 중국 역대 최대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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