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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으로 망하고, 아편으로 부흥한 나라, 중국(1편) : https://peacefulbreak.tistory.com/33

1840년 5월,

영국 해군은 병사 4000명,군함 20척을 차려 싱가포르를 출발해 남중국해에 이르어 광주를 공격하려 했으나, 임칙서의 방비로 광주의 수비가 막강한 터라 대신 7월에 하문, 주산 열도, 마카오를 공격해 청군에 큰 손실을 입혔으며 중국 남부 해안가를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

8월에 이르어선 북경 코앞인 천진까지 다가오자 청은 오판과 더불어 공황상태에 빠져 임칙서를 해임시키고 전쟁을 치뤘으나 이미 제 1,2차 천비 해전으로 청 해군이 약체인 상황이 드러나면서 영국 해군은 거리낄 게 없었고 1841년이 되면서 청나라는 크게 불리한 상황이 되어 협상을 시도하려 했으나 영국의 협상 조건 중 임칙서가 폐기한 아편 배상, 홍콩(이 당시는 홍콩섬) 할양, 청 황제에 대한 존중 불가라는 청나라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항들이 들어있어서 결렬되었으며 남중국 일대는 영국의 침략으로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으니, 결국 1842년 8월 광주가 함락되고 나서야 남경조약을 맺고 제 1차 아편전쟁은 끝이 났다.

남경조약을 묘사한 그림

이 전쟁으로 인해 청나라에 들어가는 아편의 양은 전보다 더 많아지게 되었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고위층에서 주로 돌던 아편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아편 중독자 마저 엄청나게 불어났다.

홍수전(洪秀全)

이런 현실을 보다 못한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과거 낙방생이던 홍수전이었다.

3수 끝에 낙방한 그는 중병에 걸렸는데, 꿈에서 상제(여호와)와 야소(예수)를 뵈 자신이 그 둘의 후계라 믿었으며 배상제회를 세워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며 동시에 아편과 술,담배,전족같은 여러 폐단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청 정부는 홍수전이 한족이라는 것과 반청 사상이 강하던 남중국 출신이라는 점,기독교도라는 점 때문에 조기에 탄압하려 했으나 홍수전은 오히려 반청,기독교 국가 건설이란 목표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를 태평천국의 난이라 부른다.

 

14년에 걸친 난은 전 중국을 초토화 시켰으며, 여기에 회하 일대에서 일어난 염군의 난까지 겹쳐 거의 20년 가까이 청나라는 반란에 시달렸으며 특히 풍요롭던 장강 삼각주 일대는 상해의 성장 이전까지 옛 영광을 되찾지 못할 정도였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광동성에선 영국 배인 애로 호의 영국 국기가 불타는 애로호 사건이 발생, 광서성에선 아편전쟁 이후 기독교 포교를 보장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지 주민들에 의해 프랑스 신부가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져 분노한 프랑스와 영국이 손을 잡고 청을 재침공하니 이를 제 2차 아편전쟁(1856~1860)이라 부른다.

청은 태평천국군과 영국군, 프랑스군을 동시에 상대할 수가 없어서 영,프와 굴욕적인 협상 끝에 천진조약을 맺게 되었으며 그 대가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 영국, 프랑스의 힘을 쓸 수 있었다.
이 시기 전란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약 2000~3000만에 달했으며 이는 청나라 인구의 5%가 훨씬 넘는 숫자였다.

청 문종 함풍제

제 2차 아편전쟁 막바지인 함풍 10년(1861년) 함풍제가 죽을 무렵엔 이미 전 중국에 아편이 성행했으니 이는 동치, 광서 시대의 암울하고 비참한 사회의 예고나 다름없었다.

청 목종 동치제


동치제는 역대 황제들 중 제일 단명했는데, 모후인 서태후의 학대, 말이 아닌 나라 꼴과 성년이 되어서도 권력을 놓지 않는 서태후의 만행으로 무기력해져 아편과 주색으로만 세월을 보내다 고작 20살의 나이로 죽었는데 도광제는 아편 중독까진 아니어도 나름 아편을 많이 피웠음에도 불구하고 69살까지 장수할 수 있었지만 동치제는 아니었다.

그나마 이 때는 도광-함풍 시기와는 좀 덜한 서구의 침략과 자연재해도 일시적으로 줄어들어 청나라의 마지막 평화가 찾아오고 양무운동이라는 서구식 개혁도 시도했으니 이를 동치 중흥이라 한다.

하지만 동치제가 죽고 나서 서태후의 만행은 더욱 심해졌고,청나라의 황위 계승 문제와 더불어 서구와 일본의 재침략으로 청나라는 거대한 식물인간이 따로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아편 중독에 빠질 정도였으니 이 때의 청나라는 사실상 초거대 아편굴이나 다름없는 신세기도 했다.

청 덕종 광서제
서태후

서태후는 동치제가 죽자 조카 광서제를 즉위시켜 계속 권력을 휘둘렀으며 양무운동은 동치제가 죽고 나서도 계속 이어졌으나 서태후의 계속된 실정과 사치로 이미 동치제 초기의 그럴듯한 모양새 마저도 사라진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1880년대 초반엔 청불전쟁에서의 선전과 조선, 베트남에 군대도 보낼 정도로 약간이나마 힘을 회복한 상태였으며 개혁은 나름대로 성과가 있는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광서제가 친정을 했던 기간 동안 청나라는 여러 악재가 겹친 데다 청일전쟁에서도 패해 그나마 남은 힘도 완전히 없어져 서태후는 이걸 구실로 삼아 광서제와 친했던 강유위,양계초같은 신진 세력들을 내쫓거나 죽인 후 광서제를 유폐시켜 학대한 뒤, 광서제의 애첩까지 죽여버렸다.

급기야 1900년대엔 일본과 러시아가 요동, 만주를 차지해 청나라는 영토가 열강들에 의해 쥐파먹은 듯 훼손 되었으며 명목상 청 영토와 조선 근해에서 벌어진 러일전쟁 때도 아무런 힘조차 쓸 수 없었다.

이에 서태후는 광서 37년(1908년) 광서제를 감금시킨 뒤 손자를 즉위시킨 후 원세개를 시켜 광서제를 독살한 뒤 불과 하루만에 자신도 죽었다.

그리고 즉위한 서태후의 손자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 선통제였다.

손문

서태후가 죽은 지 불과 3년 뒤, 남경에서 혁명이 일어났으니 이를 신해 혁명이라 부른다.
청나라 각 성들은 독립을 선언하여 청나라에 대한 반기를 드러냈으며 청나라는 하북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몰락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마지막 내각총리대신인 원세개는 손문과의 협상 끝에 청나라를 멸망시켰으니 300년 가까이 중국을 통치하던 청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4000만명의 아편 중독자들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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