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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고, 중국은 공산화되었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은 황급히 본토에서 떠나, 타이완으로 도망치게 된다.

이에 장제스는 타이완보다 중국 본토에 가까운 '금문도' 에 일정 수의 부대를 남겨, 추격하는 중공군에 결사항전할 것을 명하게 된다. 
 1958년 8월 23일 

새롭게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 제1대 국가 주석 마오쩌둥은 패전하여 퇴각하는 국민당군을 추격, 섬멸할 것을 명하게 된다.

한창 승리에 취해있던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 인민해방군 10만명을 금문도로 보내게 된다.

금문도에는 장제스의 특별 명령을 받은 2만명의 국민당군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점에 도취되어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국민당군은 장제스의 특별 명령을 받은 상태여서 그런지 그 기세가 한창 날카로웠다.
하지만, 중국 인민해방군은 머릿수만 믿고 10만명의 중공군을 금문도에 무리하게 투입한다.

본래, 상륙작전을 할 때에는 해군 함대의 엄호 사격, 공군의 폭격 등 지원과 엄호가 있어야 하며, 그 모든 것이 갖추어졌을 때 상륙을 해야 한다.
그런데, 중국 인민해방군은 자만감에 빠져 해군, 공군의 엄호 사격 없이 상륙함만 보낸 것이다.
이에, 상륙하기도 전에 국민당군의 포대에 의해 무장이 되어 있지 않은 상륙함들은 박살이 나고, 포격을 피해 상륙한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이 매설해놓은 지뢰에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고, 부상당한 중국 인민해방군은 금문도 주민들에게 몽둥이 공격에 의해 대다수가 전사한다.

이 싸움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1만여명이 국민당군 혹은 주민들에 의해 사망하였고, 4,000여명의 중국 인민해방군은 포로가 되어 타이완으로 압송되었다. 

1958년 7월, 이라크 왕국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전복되었다.
이에 이라크에서는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미국과 영국은 혁명의 여파를 방지하기 위해 중동의 레바논, 요르단에 군사를 파병한다.

이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중동 인민의 반침략주의 전쟁을 지지한다!" 라고 주장하며, 타이완 해협에 병사를 파병하여 증강시키고 중화민국의 금문도를 공격할 준비를 하게 된다.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 중국 인민해방군은 금문도에 기습 포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전투 개시 2시간 만에 4만 발의 포탄이 사용되었고 그 날 하루에만 5만 7천 발의 포탄이 사용되었다.
중공군의 기습 포격으로 국민당군 440여명, 금문도 방어 사령부 부사령 길성문, 조가양, 장걸이 전사하였다.

미국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금문도 포격 소식을 접하고서는 중화인민공화국에 "금문도를 공격하는 것은 평화에 대한 위협" 이라고 말하며 경고한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경고를 무시하고, 다음 날인 8월 24일, 금문도에 포격을 재개한다.

이에 중화민국(타이완)은 반격을 개시하고,

미국은 제7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파견한다. 

더 나아가 F-104A 전투기를 중화민국에 파견한다.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장제스에게
"금문도는 미국, 대만 공동방위조약에 포함 되지 않습니다."
"금문도를 포기하십시오." 라고 하지만, 장제스무시로 대응하며 금문도에 대한 절대 사수를 결의한다.
 


 이에 미국 국방부에서는
"금문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전술핵을 사용할 수도 있다." 라고 협박하며 전술핵을 사용하려 하지만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 제1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에,
"미국, 소련간의 핵공격을 촉발하지 말라." 라고 하며 경고한다.


9월 18일, 미국은 중화민국에 8인치 유탄포를 제공하였고, 9월 26일, 중화민국은 미국이 제공한 무기로 반격을 가하여 중국 인민해방군에 큰 타격을 입힌다.
이에 10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 펑더화이"금문도에 대한 포격을 7일간 중지한다." 라고 발표하였고, 10월 13일, 추가로 "금문도에 대한 포격을 14일간 중지한다." 라고 발표한다. 

금문도를 시찰하는 장제스

그 후, 금문도 포격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1979년 1월 1일, 미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수교하게 되자 20년에 걸친 금문도 포격전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금문도 포격전에서는 47만발의 포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금문도의 포탄으로 금문도 주민들은 칼을 만들었고, 이는 금문도의 명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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