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영국의 절대왕정 몰락과 입헌군주제 수립
서양 역사의 이해에 있어서, 대략 16-18세기는 '절대왕정의 시대'라고 하여, 근대사회 성립 초기 단계로 이해한다. 즉, 이른바 초기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근대 국가체제 형성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근대문화의 기반이 구축되었던 시기라고 이해한다. 이 시기 절대 왕권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국가 통치 기반(조세제도, 관료제와 상비군제도)이 이루어지고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기반으로 하여 국력의 증진이 추구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국가는 무엇보다 왕조 국가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영국의 혁명(청교도, 명예혁명)과 혁명 이후, 특히 19세기 영국의 점진적 개혁은 절대 왕정에서 시민 사회로의 이행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영국 혁명과 영국의 자유주의적 개혁의 배경, 과정 및 결과,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서양의 역사에서 16~18세기는 흔히 '절대왕정의 시대'라고 불린다. 이 시기는 봉건적 세력의 힘이 근대 시민 세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로, 몰락하는 봉건세력과 성장하는 근대 시민세력이라고 하는 두 개의 이질적인 세력이 불안한 균형을 이루던 시기였다. 이 시기 봉건 세력과 시민 세력의 충돌을 중재했던 존재는 바로 군주였는데, 국왕은 봉건 세력의 이익을 존중하되 점차 시민 세력의 입지를 늘려가면서 자신의 권위 또한 신장시켰다. 그 결과 유럽 각국에서 강력한 전제 군주 권력이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절대왕권'이다.
절대왕권이 확립된 절대주의 국가는 점차 봉건 제후의 지방분권적인 정치 체제를 지양하고, 국왕 권력을 중심으로 국가적 통일이 이루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또 행정, 사법, 군사적인 면에서 국왕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된 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때 중앙집권 체제의 중심이 된 왕권은 매우 강대하였고, 전형적인 전제정의 형태를 보인다. 이 절대주의 체제는 대내적으로는 치안 유지와 국가 경제의 발전,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영토의 보전과 확대, 나아가 식민지의 경영을 위하여 강력한 관료 기구와 상비군을 필요로 하였다. 절대왕권을 사상적으로 보좌하는 것은 바로 '왕권신수설'로, 이 사상은 왕의 권한과 권위는 신이 내려줬다고 하여 절대왕권을 옹호하고 절대왕정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써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관료제과 상비군, 이 두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는데, 바로 이 비용을 위해 조세제도가 마련되고 '중상주의' 경제 정책이 등장하였다.
중상주의는 국가 활동 전반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통제, 그리고 국내 산업의 보호와 육성을 주 내용으로 하는 경제 정책이었다. 그리고 중상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절대 왕권에 의한 국가의 통일과 국가 권력의 증대에 있었다. 이러한 절대왕권은 왕권이 봉건 귀족에 맞서, 성장하는 시민 계급과 제휴함으로써 등장하게 된다. 특히 상층 시민들은 상업 자본가로서, 국왕의 관료로서 절대주의 국가 권력의 강화·확대에 크게 공헌하였다. 상층 시민과 절대권력 간의 결합은 절대주의 권력 성립의 불가결한 한 요소를 이루었다. 부유한 상층 시민들이 국왕의 절대왕권을 지원했던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간단하게 보자면 상층 시민 또한 이익을 위해 왕을 지지했던 셈이었다.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등장으로 국내 시장이 통합되고 봉건제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던 상인들의 이동이 간편해졌다. 또 국왕은 국가의 부를 늘리기 위해 해외의 식민지를 개척하고 보호관세를 도입하는 등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는데, 이 또한 상층 시민들의 부를 늘려줬기에 이들은 국왕을 지원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절대주의가 갖는 또 하나의 성격은 절대주의 권력이 상반되는 두 개의 대조적인 모습을 아울러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절대주의 권력은 초계급적인, 초월적인 지배 권력2인 동시에 국왕이 최대의 봉건 제후이며 국왕도 봉건 제후의 특권을 갖고 있는 봉건적인 정치권력인 것이다. 이처럼 절대왕권은 근대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전근대적인 왕조 국가적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절대주의의 이러한 성격은 초기까지만 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국왕이 시민 계층과 손을 잡고 절대왕정을 형성한 절대주의 시대의 초기까지만 해도 국왕의 이익과 시민의 이익은 보통 일치하곤 했다. 하지만 절대주의 시대의 말기에 가까워질수록 시민 세력의 힘이 강해져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려고 하자 왕권은 보수 세력과 손을 잡고 점차 보수반동화 하였다. 봉건적 잔재를 말소하려는 시민들의 노력은 종종 실패로 끝났으나, 영국을 시작으로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각지의 절대주의 권력은 마침내 시민 혁명으로 타도되었다.
절대왕정은 봉건제보다도 더 강력한 왕권의 존재 속에서, 근대로 가는 길이 열린 시기이다. 이 시기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가장 봉건적인 것 - 왕권과 가장 근대적인 것 - 시민계층이 공존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존 체제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무너지게 되어 점차 시민계층으로 권력이 이전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절대왕정을 타파하기 위한 시민들의 혁명을 통해 상세히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시민혁명인 대혁명, 미국의 시민혁명인 독립전쟁과 더불어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은 절대주의 권력을 타파한 대표적인 시민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역시 타 유럽국가와 마찬가지로 절대왕정의 모습을 성립하였다. 영국은 젠트리의 등장과 장미전쟁으로 인해 봉건 세력이 대거 몰락하면서 타 유럽국가와는 다르게 순조로운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근대화 과정은 그 제도적인 특면에서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강한 연속성을 보였다. 영국 절대왕정의 최절정기인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의 치세(1558∼1603) 당시 영국은 종교적인 면에서 성공회를 통해 국민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관료 기구를 정비하여 젠트리를 대거 등용하였다. 또 여러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되었는데, 영국 중상주의의 꽃이자 제국주의의 시발점인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 1600)가 설립된 시점도 이 시기였다. 이처럼 찬란한 절대왕정이 유지되던 와중에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면서 튜더 왕조(Tudor Dynasty)가 막을 내리고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1세(James I)가 영국의 왕으로 즉위한다.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의 강력한 지지자였고,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전제정을 강화하고자 하였다.4 그의 정치적 방향은 청교도 및 국교도, 그리고 당시 급속하게 성장한 의회 세력과의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험난한 스코틀랜드 정치에 익숙했던 제임스 1세는 비교적 잉글랜드 정치에 나름대로 적응할 수 있었고, 의회에 대해서도 완전히 대척되는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의회가 영국 왕실의 주요 재정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찰스 1세(Charles I)는 전제주의 정책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의회와의 대립을 격화시키고, 가톨릭이나 장로교의 세력이 비교적 강했던 아일랜드·스코틀랜드의 정치와 종교 세력에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를 강요하는 등 강하게 간섭하는 형태를 취했다.5 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와의 대외 전쟁을 치루는 등 왕실의 재정 또한 점차 악화되었는데 이 문제를 해소하고자 찰스 1세는 다양한 세금을 매겼다.6 그러나 재정상의 궁핍이 해결되지 않으면서 찰스 1세는 의회에게 새로운 과세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의회는 오히려 국왕의 과도한 과세를 억제하고 의회의 권위와 권한을 회복하는 권리청원을 제출하였다. 찰스 1세는 마지못해 권리 청원을 수용하나 이후 의회를 해산하고 11년간 소집하지 않는다.
1640년 스코틀랜드에서 성공회를 강요하는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William Laud)7에 반발한 장로교파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찰스는 전비의 조달을 위해 의회를 소집하는데, 소집된 의회는 왕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히려 국왕을 비판한다.8 찰스 1세는 의회의 태도에 분노하여 의회를 해산하였으나,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9 하지만 의회가 절대 왕정 자체에 대한 전면적 도전을 하게 되자 찰스 1세는 군대의 힘으로 의회를 굴복시키려 하였으며 의회가 이에 맞대응 하면서 마침내 내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주도적인 세력을 형성한 사회계층은 젠트리였는데 이들은 의회파와 왕당파로 갈라졌다. 이들의 차이는 지위에 있다기보다는 정치·종교에 대한 의견 차이와 국왕에 대한 정서 차이였다. 내란의 초기 2년에는 왕당파가 우세하였으나 점차 의회파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젠트리 출신의 열렬한 청교도였던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철기병(Ironside)1011을 조직하여 마스턴 무어(Marston Moor)에서 국왕군을 격파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달라지게된다.
네이스비 전투(Battle of Naseby)12 등을 통해 왕당파에 승리한 의회파는 입헌 왕정과 공화정의 체제를 두고 분열하였다. 당시 의회의 개신교 세력 내부에는 입헌왕정을 주장하는 장로파, 제한선거제적 공화국을 주장하는 독립파(회중파), 그리고 독립파 내부에서도 일원제와 보통선거제 등 급진적인 성향을 띈 수평파가 존재했다. 이들의 분열은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로 탈출하는 기회를 마련하였고,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장로파와 합작하여 반혁명군을 일으킨다. 그러나 크롬웰을 중심으로 의회파는 내부의 혼란을 단호하게 수습한 뒤, 반혁명군을 격파하고 찰스 1세를 다시 체포하여 1649년 국왕을 사형에 처하고 자유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13 이것이 바로 청교도 혁명이다. 청교도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크롬웰을 비롯한 의회 세력은 런던 상인과 같이 상인들의 지지를 받아 전비를 쉽게 조달할 수 있었다. 또 청교도인 선원들을 중심으로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대륙과의 청교도 세력과 연락이 유지될 수 있었으며, 통상 및 관세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신성한 계약'을 승인하겠다며 1643년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얻는데 성공했다. 물론 의회 진영에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존재했다는 것 또한 왕당파에 비해 상당한 이점이었다.
자유공화국이 성립되었을 당시, 영국은 극심한 혼란에 직면했다. 그러자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수단으로 크롬웰은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 군대를 배경으로 독재 정치를 실시하며 여러 개혁을 실시했다. 호국경 통치 하에서 영국은 일단 평온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14 크롬웰은 영국 자본주의 확립의 기초를 닦았으며 엄격한 청교주의에 입각하여 화려한 풍속, 유희, 오락 등을 단속하였다. 크롬웰이 사망 후 호국경은 세습이 되려하나, 호국경 정치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찰스 1세의 아들이 국왕으로 추대된다. 이로써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찰스 2세(Charles II)는 입헌 군주제의 실현이라는 영국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제정을 실시하고 친 가톨릭 정책을 펼친다. 시대의 역행이 이뤄진 것이다. 찰스 2세가 가톨릭 신자를 위주로 공직을 구성하자 의회는 심사율(test act)을 만들어 비국교회 신자의 공직취업을 금지했다. 종교를 기준으로 공직의 취임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근대적인 성격을 가진 법은 아니었으나 이 법은 본 목적은 당시 의회가 찰스 2세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의회는 인신보호법을 통과시켜 왕의 자의적 구속을 금지하였다. 찰스 2세 다음에 취임한 제임스 2세(James II) 역시 전제정을 실시한 친가톨릭주의자였다. 그는 또한 의회가 통과시킨 심사율과 인신보호법을 무시해 의회의 권위를 상당히 훼손했을 뿐만 아니라 의회와 왕권 사이의 균형을 무너트렸다.
제임스 2세의 실정은 상당했는데, 우선 그는 절대왕권의 표본인 상비군을 2만 명 모집해 그 힘으로 찰스 2세의 서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몬머스 공작(Duke of Monmouth)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또 가톨릭주의자들이 자유롭게 정치에 참여하도록 심사율 폐지를 의회에 제출하였는데, 의회가 이를 부결시키자 왕권으로 심사율 폐지를 선언하였다. 또 문무의 모든 요직에 가톨릭 계열의 장교나 관리를 임명하였고, 주교를 등용하였으며 기존의 관료들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시도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를 비롯해 일부 종교인이 신교 자유령을 공표하려 하자 캔터베리 대주교 및 7명의 종교인을 런던탑에 투옥시켰으며, 유서깊은 옥스퍼드의 모들린 칼리지(Magdalen College)에 가톨릭 학장을 임명시켜 신교계의 불만을 샀다. 하지만 의회의 불만을 폭발시킨 사건은 바로 1688년 이탈리아인이자 2번째 왕비인 마리 모데나(Mary of Modena)가 아들인 제임스를 낳은 것이었다. 제임스 2세의 아들이 태어나면서 가톨릭 왕조의 세습이 확실시되자 의회로서는 심각한 불안감에 휩쌓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의회는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와 네덜란드 총독인 오라녜 공에게 영국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오라녜 공 빌렘1516은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상륙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의회는 1689년 윌리엄 3세(Willem III)와 메리 2세를 공동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 사건은 유혈을 보지 않고 이루어진 혁명이었기 때문에 '명예혁명'이라 불리고 있다. 명예혁명으로 영국은 유럽에서 절대 왕정을 타파하고 의회 중심의 입헌 정치로의 길을 열었다. 윌리엄과 메리는 공동으로 왕관을 받을 때 의회가 제출한 권리의 선언을 승인한다. 이것이 바로 권리 장전이며, 이를 통해 영국에는 의회정치와 입헌 군주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뿐만 아니라 권리 장전은 외교사적인 측면에선 영국이 유럽 외교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는 시발점이기도 했다.17 이후에 영국 왕실의 대가 끊기자 독일의 하노버 공이 조지 1세(George I)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조지 1세는 당시 영국어를 할 수 없었으며, 이러한 왕을 대신하여 내각이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 즉, 내각 제도가 수립되기 시작하였으며 "국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는 않는다."라는 말도 이때 등장하였다.
이처럼 영국은 두 차례의 혁명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자유주의적 개혁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가장 전형적인 시민혁명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과는 달리 영국의 혁명은 완전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영국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시민) 계층은 종교적인 성격이 농후하였다. 종교적인 성격이 농후한 것은 봉건제도의 산재라 할 수 있으므로 완전한 근대로의 지향이라 하기는 힘들며, 지주 귀족의 역할이 커서 불철저하고 미숙한 시민혁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즉,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낡은 체제에 대한 철저한 개혁이 지주 귀족의 눈치를 보느라 전면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수정을 하는 형식으로 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국 혁명은 세계 최초로 이루어진 시민 혁명이었으며, 절대 왕정을 타파하고 근대적인 국가로 가장 먼저 들어섰다는 것에서는 그 의미가 크다. 그 결과 의회 내 지주층과 산업 자본가를 중심으로 중간층(middle class)이 형성되었으며, 이후 중간층은 중산층으로 나아가는 형태를 보였다. 또 이러한 중산층은 영국 역사를 넘어 세계 역사의 주역이 된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빠른 영국의 중간층 형성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이전의 봉건 세력을 완전히 일소시켰으나, 혁명의 광란 속에서 제3계급 또한 큰 피해를 입어 중산층의 형성은 영국에 비해 늦어지게 되었다. 즉 프랑스의 대혁명에 비해 영국의 시민혁명은 비록 점진적이고 미흡했을지언정 연속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프랑스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더 먼저 중간계급이 형성되어 근대화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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