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고려시대의 현실주의자, 김부식
한국사 공부를 하다보면 한번 쯤 들어봤을 이름 김부식이라는 인물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모두 잊고 당시의 상황과 현실을 고려해서 "김부식"이란 위인을 재평가하고자 한다.
김부식을 지칭하고 있는 단어는 rationalist, 즉 이성론자, 합리주의자를 뜻한다.
우리가 고려사회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핵심 키워드가 몇가지 있는데, 예를 들면 "다원화", "개방화", "불간섭주의", "실리주의"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실리주의는 고려를 '무조건 적인 명분론적 사대주의에 치우치지 않은 자주적인 나라' 혹은 '국익 추구라는 명분속에 반쪽짜리 황제국으로 남았던 나라' 라는 정반대의 평가를 할 수 있도록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역사를 배우지만 정치는 현실이다. 라는 것이고, 뚜렷한 정책과 신념으로 국익을 우선시 했던 유연한 외교를 통해 당당했던 국제 위상을 동시에 챙겼던 점은 고려왕조를 평할 때에 분명 칭찬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rationalist, 실리주의가 고려를 대표하는 키워드인 만큼 사실 고려사에는 현실론을 바탕으로 국정을 이끌었던 위대한 정치가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권모술수의 달인으로서 야심을 이룬 뛰어난 책략가와 나라의 위기를 냉철히 타개했던 명신들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광종조의 "쌍기"라던가 성종조의 "최승로", 현종조의 "왕가도", 그리고 인종조의 "김부식", 고종조의 "최우" 여말에는 "이제현", "정도전"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지
사실 현실론과 이상론이라는 것이 백지장 차이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역사속의 이상론자 역시 당시에는 그러한 이론을 지극히 ' 현실적인 돌파구 '란 생각에 도박을 했던 거고, 그 것이 성공을 한다면 후대 역사에서는 당시 현실을 정확히 파악한 냉철한 정치가로 평가 받게 될 것이니 말이다.
이런점에서 본다면 상대적으로 판이 꽤나 큰 도박을 벌였던 쌍기와 최승로, 정도전 등은 엄밀히 말해 현실론자가 아닌 "성공한 이상주의자"의 범주에 넣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위의 걸출한 인물들 중에서도 당대와 현대 시각, 모두에서 적용할 수 있는 대표적 이성론자로 김부식을 언급할 수 있다.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먼 후예로 그 형제들이 모두 학문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 중에서도 부식은 송나라 사신 서긍이 평하기를, '학식에 있어 존경 받기로 그를 앞설 자가 없다'고 했을 만큼 뛰어난 학자였다.
김부식에게는 동생 부철이 있었는데 이들 형제의 이름은 중국 역사상 대문장가로 손꼽히는 북송의 소동파(蘇東坡). 본명 소식/소철 형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귀주대첩 후 고려가 한참 잘나갈떄, 송나라가 고려 사신을 대접하느라 나라가 휘청휘청 했을때,
'고려와의 무역은 나라의 해만 있을 뿐이다' 라며, "고려 해악론"(高麗害惡論)을 주장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신기하게도 소식 역시 김부식과 마찬가지로 왕안식의 신법의 반대파였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청년 김부식은 소식에 비견 될 만큼 당대의 최고의 문인이자 고려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중국에도 널리 떨쳤고 송에 사신으로 가서는 황제로 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김부식의 4형제 모두가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조정에서 한자리 씩 하게되면서, 김부식의 가문은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지배세력인 문벌귀족 중에서도 대표적인 가문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 김부식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자겸과 관련된 에피소드에서 옅볼 수 있다.
이자겸이 당시 천하권세를 모두 쥔 절대권력자로 군림할 당시, 박승중(朴昇中)은 그런 이자겸의 권위를 더욱 높이기 위해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고 부르자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김부식은,
“생일을 절(節)이라고 하는 것은 예로부터 없었던 일입니다. 당나라 현종(玄宗) 때 비로소 황제의 생일을 천추절(千秋節)이라고 하였으나, 신하의 생일을 절이라고 한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생일을 "절"이라 부르는 것은 천자(황제) 혹은 태자와 태후에게만 가능한 일이었거다.
그런데 이런 김부식에게도 학문적 라이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묘청, 백수한과 함께 서경세력의 핵심 인물이자 천재적인 시인으로 유명했던 "정지상"이었어.
참고로 서경세력은 인종을 도와서, 당시 독보적 전설을 써내린 무장이었던 "척준경"을 제거하면서 급부상하는데, 그 때 중추적 역할을 한게 바로 또 이 정지상이다.
게다가 정지상은 윤언이와 더불어 열렬한 신법론 지지자였다.
윤언이는 윤관의 아들로 금나라가 칭신을 요구했을때, “우리 임금이 근심하고 신하가 모욕을 당하니 저는 감히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습니다. 여진은 본래 우리의 자손이기에 신하가 되어 천자의 조정(고려)에 조회하여왔으며, 국경 부근 여진인은 모두 우리나라에 속한지 오래입니다. 우리가 어찌 반대로 신하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했을 정도로 강직한 사람이었다.
숙종조에 별무반, 화폐개혁 등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했던 신법.
정지상은 시인으로서 학문적으로도 김부식을 능가하는 천재였지만 정치적으로도 중앙문벌귀족의 거두였던 김부식을 압박하는 서경세력의 핵심인물이자 대표적 신법론자 였던 것이다.
반대로 김부식은 '문종조 완비된 구법과 전통'을 중시하는 한편, 단기간에 이룩하는 부국강병보다는 기존질서를 유지하고 국내외적으로 안정된 정권을 추구하는 구법론자이자 보수론자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국내의 안정이란 중앙 문벌귀족의 지배권을 결코 상실할 수 없다는 귀족들의 이해타산적인 계산도 포함되었다.
김부식은 그 세력의 정점에 있었다.
이 와중에 신법론자들은 궁극적으로 금나라를 정벌해야한다는 노선을 걷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대립각이 형성될 수 밖에 없었다.
신법론 - '무너진 고려의 위상을 되찾지 못하면 고려는 내리막이다. 개혁만이 살길이다.'
구법론 - '고려는 충분히 건재하다. 공연히 백성들이 고역을 치루게 할 수 없다.'
정치이념과 현실론의 대립이었다.
이러한 대립 속에 인종은 서경파의 손을 들어주었고, 서경천도를 계획, 어마 무시한 규모의 황궁 (대화궁) 을 창건했다.
또 때가 되면 금나라를 치기위해 수시로 사신과 스파이를 보내 상황을 살폈다.
사실 고려사『김부철 열전』에 보면,
금나라가 고려에 형제맹약을 맺자고 했을때부터 고려의 대신들이 사신의 참수를 주장할 만큼 조정은 금과의 전쟁마저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굳건했고, 이는 곧 당시의 국론이기도 했다.
다행히 이자겸에 의해 고려는 금과 사대관계를 맺었지만, 지금은 이자겸이 제거된 상황이었다.
마침 변방에서 금이 송을 쳐들어갔다가 대패하자 송군이 반격하여 금나라 국경 깊이까지 들어갔다는 보고가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이때 정지상은 마땅히 출병하여 금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종은 깊이 고민하며 조력자 김인존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그는 사신으로 갔던 일행을 기다리며 신중을 기하자고 대답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때 송에 사신으로 간게 당시 추밀재상 김부식 일행이었던 것이다.
김부식은 돌아와서 국경의 보고가 잘못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송나라의 수도가 폐허가 됐고 황제가 포로로 잡혀 북송이 패망했다는 사실을 아뢰었다.
결국 금국 정벌은 일단 보류된다.
한편, 서경천도는 화재 등 연이은 천재지변에 인종의 마음이 돌아서게 된다.
결국 일을 내고만 서경파들은 천하 36개국 내지 72개국을 모두 고려에 복속시켜서 진정한 천자국이 되어야 한다며, 제2의 황도인 서경에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워버린다.
국호는 대위국(大爲國), 연호는 천개(天開).
그 군사는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 이라하여 서경파의 실질적 리더 중 한명인 분사시랑 조광(趙匡)이 지휘했다.
이에 김부식은 임금에게 보고도 없이 개경에서 정지상을 비롯 서경파 인사들을 단번에 숙청하게 된다.
진압군 원수로 임명되어 서경으로 출정하였고, 김부식과 함께 이부상서 (현 안행부 장관)였던 동생 부철 역시 좌군을 통솔했으니 형제가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서경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은,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吏部事)
감수국사 상주국 태자태보(監修國事上柱國太子太保)로 승진하여 조정에 권위가 비길 자가 없게 되었고, 곧 삼국사기를 저술하여 역사가로서 또 한번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의종 즉위 후 부식은 낙랑후(樂浪侯)에 책봉되어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사후에는 중서령(中書令)을 추증,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게된다.
여기서 김부식은 사대주의자였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김부식과 사대주의는 고려사를 대표하는 논쟁 거리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편견을 깨고 현실 정치를 했던 김부식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한 힌트를 계속해서 던져보았다.
① " 사대주의자라기 보다 현실론자 또는 귀족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② " 고려를 천자국으로, 인종을 천자로 인식했다."
③ " 왕권수호론자이자 민족주의자이다."
김부식은 현실론자다. 물론 단순히 본다면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은 사대 혹은 자주의 성격을 띄고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사대냐 자주냐가 아닌 개혁이냐 유지냐. 신법이냐 구법이냐의 구도로 파악해야 한다.
사대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고려조의 사대와 조선조의 사대는 그 개념 자체가 다르다.
적어도 고려 중기까지는 소중화(小中華)가 아니라 다원론적 천하관(多元論的 天下觀)으로 운영되던 사회였다.
즉 김부식은 고려의 임금 역시 천자 내지 황제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김부식 개인의 판단이 아닌 하나의 사회적 룰이었다.
그 첫번째 근거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올리는 표인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에 인종을 황제를 지칭하는 "성상폐하"라고 부르고 있다.
둘째. 표(表)를 올리는 것 자체가 천자에 대한 예법. 왕에게는 전(牋)을올리는데 고려시대는 임금에게 표를, 태자에게는 전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삼국의 역사는 세가가 아닌 본기(本紀) 부터저술 하였는데 황제의 사적은 본기에, 제후의 사적은 세가에 기록하는게 법도였다.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개찬되어 본기 없이 세가 부터 시작한다)
- 진삼국사표 中 -
성상폐하(聖上陛下)께서는 요(堯)임금과 같은 문사(文思)를 타고나시고, 우(禹)임금과 같은 근검(勤儉)을 체득하시어, 정무에 골몰하던 여가에 전고(前古)를 두루 살펴보시고...
하물며 생각컨대, 신라ㆍ고구려ㆍ백제가 나라를 세우고 솥발처럼 대립하면서 예를 갖추어 중국과 교통하였으므로... 중국의 일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습니다.
즉 엄밀히 말해 김부식은 고려의 위상을 깎아내리자는게 아니라 아쉽지만 현재의 질서와 위상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무너진 고려의 위상을 유지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국내적으로 본다면 혼란스러운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어찌 되었던 사상최대의 내전인 서경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고, 이자겸, 최충헌등 권신들과 달리 그 권위를 남용하지 않았다.
임금에게 도전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과 자부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그는 삼국의 정사를 편찬했다.
때문에 그는 왕권수호론자이다. 또는 민족주의자다.
삼국사기 부분부분에 화이론적 시각을 가끔 인지하게 된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안그래도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사, 그 중에서도 고대사를 통해 우리의 뿌리를 찾는 것 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적 인물을 평할 때에는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과 사회분위기등을 종합하여 신중히 판단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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