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전국시대를 제패한 짚신 품던 원숭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존경받는 리더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한국에선 정유재란과 임진왜란으로 원흉으로 각인된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가 행한 일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가 걸어 온 길을 보면 흠뻑 빠져들정도로 매력적이다. 퍼포먼스, 결단력, 모험...그리고 지략으로 평민에서 관백(천황대리인)까지 오른 이가 바로 히데요시다.
농민 출신인 그가 전국시대의 환란 속에서 어떻게 천하인이 될 수가 있었을까?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끔 만든다." 로 유명한 그의 일생을 공명의 갈림길(2006)을 통해 되돌아 본다.
오와리의 영주 "오다 노부나가"에게 사관을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에서 태어났다. 아시가루(일반 병졸)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로 어렸을적엔 [히요시], 젊은 시절엔 [토우기치로]라고 불리었다. 당시 오와리를 막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를 몸종으로서 섬기게 된다. 어느 추운 겨울, 노부나가가 발이 시렵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짚신을 가슴에 품는 등, 재치있는 언행으로 인해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게 된다.
당시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 얼굴 생김새로 인해 사루(원숭이)라 불렀다고 한다.
당시 때는 전국시대. 천황을 옹립한 아시카가 장군가가 힘을 잃고, 지방의 영주들이 끝었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와리를 통일하고, 슨푸의 대영주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한 노부나가는 교토에 있는 천황을 옹립하기 위해 그 관문인 미노를 함락하려 한다. 그러나 천하의 요새라 불리우는 이나바야마 산성 공략은 여간해선 이룩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때 히데요시는,
스노마타성 축조
오와리와 미노를 흐르는 강 중간에 지성을 지어 공략하기 쉽도록 하자면 제안. 3일만에 자신이 완성 시켜보겠다고 하였고 노부나가는 흔쾌히 허락하였다.
상대방의 영토안에서, 그것도 성 아래에서 3일만에 지성을 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비를 털어 친분을 쌓아 둔 떠돌이 무사와 불한당들의 도움으로, 강 상류에서 짚으로 엮은 나무를 흘려보내는 형식(현대 조립식 건축법과 비슷하다고 함)으로 예견했던 3일만에 지성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사이토 가문의 젊은 군사였던 다케나카 한베에를 노부나가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공을 세워 자신이 쌓은 지성(스노마타성)의 성주가 되었고, 토우키치로 히데요시 란 이름을 하사받게 된다. 이때 다케나카 한베에는 히데요시의 인간적인 매력에 반해 노부나가 직속이 아닌 히데요시의 직속부하로 남게 되었다.
결국 다케나카의 한베의 책략으로 북동쪽 뒷길을 통해 진격해 이나바야성을 공략하는데 성공한다.
1570년 당시 오다노부나가는 아사이가의 젊은 영주 아사이 나가마사에게 자신의 여동생 오이치를 시집보내 동맹을 맺고, 교토의 록가쿠가를 명망시켰다. 그리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무로마치막부 제 15대 정이대장군으로 추대하는등, 천하통일을 위한 토대를 기축하였다.
그러나 아사이가와의 동맹 조약 "아사쿠라가를 치지 않는다"(아사이가와 아사쿠사가는 대대로 긴밀한 사이였다) 를 어기고 아사쿠라가를 침공, 이에 아사이가는 모반을 꾀하고 아사쿠라가와 오다 노부나가를 향해 진격한다.
신가리(군의 퇴로를 확보하면서 적을 막아내는 역할)을 자청
당시 아사쿠라가를 치기 위해 가즈가사키에 주둔한 노부나가군. 지역은 아사쿠라가와 아사이가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퇴로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히데요시는 스스로 신가리를 자청한다. 전투가 아닌 책략만으로 가신단에 합류했다는 이유로 기존 가신들에게 시기를 받고 있었던 그는 오명을 벗고,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기위해 모험을 건다. 본대를 퇴각시키기 위해, 시간을 벌면서 싸우는 비장한 임무, 당시 그의 결의에 시바타 가츠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등의 가신들도 감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훌륭하게 그 임무에 성공해, 본대를 교토로 퇴각시킨다.
오다니성 공략의 선봉장, 하시바로 개명, 나가하마성의 성주가 되다
1572년. 오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아사이가문의 토벌에 나선다. 아사이 나가마사의 토벌의 선봉장이 된 히데요시는 훌륭하게 오다니성을 공략하고, 오이치와 세명의 공주를 무사하게 노부나가에게 데려 온 공을 인정받아 북 오오미 지역 12만석과 나가하마성의 성주로 임명된다.
그리고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이었던 시바타(柴田) 가쓰이에, 니와(丹羽) 나가히데 의 성을 한자씩 빌려 하시바(羽柴) 히데요시 로 개명한다.(가신들의 신임을 얻기위해.)
때는 흘러 1582년. 노부나가는 교토지역의 요충지에 아즈치성을 축조하는데 전념. 가신단들에게 정벌을 위임한다(하시바 히데요시->모리가문 정벌, 시바타 가츠이에->우에스기 가문 정벌). 당시 최강의 기마군단을 보유했던 다케다 가문을 나가시마 전투에서 3천여의 조총부대를 육성시켜 승리하였고, 막부를 멸망시킨 그에게 더이상 천하통일을 위한 걸림돌은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다카마츠 성을 수공으로 공략
당시 히데요시는 뱃쇼 나가하루를 공략한 후, 모리 가문의 다카마츠 성을 공략 하는 중이었다. 3면이 산과 강으로 둘러 쌓여 공략하기 힘든 성을 히데요시는 강에 제방을 쌓아 성이 물에 잠기게 하는 기책을 발휘한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인한 혼노지의 변!! 노부나가의 죽음
당시 노부나가의 중신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는 히데요시를 도우라는 노부나가의 명을 받고 출병하는데, 도중에 길을 바꾸어 노부나가가 당시 머물고 있던 혼노지를 습격해 노부나가와 그의 적남 노부카츠를 화염 속에 잠들게 한다. 천하를 노리기 위함일까? 천황과 막부에 충성심이 강했기 때문일까? 중신으로서의 자리가 위험했기 때문일까? 아직도 그가 모반을 한 이유는 시대의 미스터리로 남고 있다.
다카마츠성 공략, 츄코쿠 온가에시(中国恩返し) 감행
아케치 미츠히데는 혼노지의 변 이후, 자신의 딸을 시집보낸 호소카와 가문과 손을 잡으려 했지만 호소카와 가문은 거절하고 히데요시에게 이 소식을 전한다. 마침 이때 히데요시는 다카마츠성의 성을 함락했을 때 였다. 히데요시는 모리가문과 화친을 맺고, 역사적인 츄코쿠 온가에시(中国恩返し) 를 감행한다. 오다가문의 역적 미츠히데를 치기 위한 명분을 갖고 3만여의 병력을 이끌고 츄고쿠에서 아마가사키까지 240km나 되는 길을 11일만에 진격한다.
야마자키성 전투 승리
오나 노부나가의 진정한 후계자는 누구인가. 히데요시인가? 미츠히데인가? 중요한 기로에 선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반나절만에 승리를 거두고, 주군의 복수를 이룩하여 후계자가 될 명분을 수립한다.
산보시를 이용해 오다 가문을 장악
키요스성에서 오다가문의 후계자를 정하는 모임에서 시바타 가츠이에는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카를, 히데요시는 산보시(노부나가의 적남 노부카츠의 아들)를 주장한다. 결국 히데요시의 의견이 방영되어 산보시를 후계자로 책정한 히데요시는 산보시의 후견인이 되어, 오다가문을 장악한다.
시즈가타케의 전투 , 세대교체의 본격화
1593년. 천하를 얻기위해 움직인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오다가의 중신 시바타 가츠이에와의 혈전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노부나가의 여동생이었던 오이치는 오다가문의 결속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가츠이에에게 시집을 간 상태였다.(히데요시는 어렸을적 부터 오이치를 사모했다고 함) 히데요시는 가츠이에를 무찌로고 오이치를 무사 귀환 시키려 했다. 그러나 전투에선 승리했지만 오이치는 가츠이에와 자결을 선택했다.
히데요시는 이 전투 이후로, 세대교체를 감행하여 자신의 직속 부하를 양성하려 하였다.
당시 젊은 무사였던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카타키리 카즈모토, 히라노 나가야스, 와키사카 나가야스, 카즈야 다케노리, 카토 요시아키를 [시즈가타카의 칠본창]으로 임명하고 각각 5천석/3척석의 녹봉을 주었다.
코마키 나가쿠테의 전투
1584년. 시바타 가츠이에 정벌에 참가하지 않고, 새해인사를 하러 찾아오지 않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는 이에야스도 천하통일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가신 합류의 부응에 응하지 않고, 노부카츠와 손을 잡고 코마키 나가쿠테의 전투에서 승리를 한다. 그러나 노부카츠가 멋대로 히데요시와 화해를 한 것으로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하였다.
관백(関白) 취임 , 오사카성 축조 , 토요토미로 개명
1585년. 관백(関白) 취임한 히데요시. 관백은 천황의 대리인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천황의 힘을 빌어 천하통일을 이룩하려 한 히데요시는 천황의 허락없이 타 영주들이 전투를 벌일 경우 반역죄로 토벌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노부나가가 아즈치성을 축조한 것처럼 그 자신도 오사카성을 축조하여 천하인으로서의 자신의 위신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리고 성을 토요토미(豊臣)로 새롭게 개명한다.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다
1586년. 히데요시 정벌에 명분을 잃고 고립된 이에야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가신으로 삼기 위해 갖은 회유책을 썼지만 이에야스는 응하지 않는다. 히데요시는 비정한 기책을 세운다. 당시 진베에란 호족과 결혼한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를 이혼시키고, 정실이 없던 이에야스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래도 응하지 않는 이에야스. 이번에는 자신의 어머니 오만도코로를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낸다.
이에야스 히데요시의 가신단에 합류하다
여동생과 어머니까지 인질로 보낸 히데요시의 정성?에 이에야스는 10월26일 1만여의 병력을 이끌고 히데요시를 알현하러 간다. 히데요시는 전날밤 이에야스의 거처를 방문하여 기쁨을 감추지 않으면서 다음날 거만한 태도로 당신을 질책할테니 이해해 달라며 말한다. 다음날 히데요시는 중신들 앞에서 이에야스에게 "왜 지금껏 나의 불음에 응하지 않았냐"며 불호령을 내렸고, 이에야스는 앞으로 당신의 갑옷이 되어 전쟁에 나설테니 지금 입고계신 필요없는 갑옷을 하사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쥬라쿠테이 행렬
1588년. 히데요시는 역사적인 이벤트를 성사시킨다. 교토에 있는 신하의 저택에 천황을 초대하는 이벤트를 5일동안 개최한다. 이 행사는 150여년만에 이뤄지는 것으로 자신의 위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천황을 대동한 행렬에는 약 6천여명의 병력이 동원되었고, 각지의 영주들이 대거 참가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적남 츠루마루 탄생 , 오다와라성 공략
1589년. 정실 네네를 포함해 각 지방마다 부인을 두었다고 할 정도로 측실이 많았던 히데요시. 그러나 50이 넘도록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결국 히데나가(친척의 아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데 53살이 되던해. 자신이 평생을 두고 사모한 오이치의 첫째딸 챠챠를 측실을 삼고 1년 뒤에 그녀를 통해 적남을 얻게 된다. 이름은 츠루마루.
한편 히데요시는 전국통일의 화룡점정으로서 관동 지방의 대영주였던 호죠가문을 공략한다. 호죠가문의 본성은 당시 전국시대 성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 오다와라성. 9km나 되는 외곽성을 자랑하였고, 이곳에 5만6천여명이 되는 병력이 농성을 하였다. 히데요시는 22만여의 병력을 이끌고, 도로와 해상을 봉쇄하는 작전으로 석달만에 오다와라성을 공략한다.
그리고 그 큰 공을 세운 이에야스에게 본거지 도카이지방 5개를 반납하는 대신에 이 지역을 포함한 관동 8개지역(140만석)을 하사한다. 이는 몇십년 동안 도카이지방에 터를 이룬 이에야스의 힘을 반감시키기 위한 계책이였다.
자신의 적남 츠루마루 사망 , 명나라 정벌을 꿈꾸다
1590년. 1살이었던 히데요시의 적남 츠루마루는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이때부터 판단력이 흐려지기 시작했다는 히데요시. 조선,명나라,인도 정벌을 꿈꾸고 그 전진기지로서 나고야성 축성을 명령한다.
이는 약 100여년동안 전쟁이 계속된 사회속에서 새로운 적을 만들지 않으면 규합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점, 영주들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한 점, 자신의 영토에 만족하지 않는 젊은 영주들의 불만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다고도 한다.
1591년엔 자신의 양자 히데츠구를 관백에 취임시키고 자신은 태합이라 칭하고 제 1선에서 물러선다.
(이때 히데요시의 어머니 오만도코로도 사망)
임진왜란 , 히데요리 탄생 , 히데츠구 척결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를 필두로 조선정벌을 명령한 히데요시. 이때 그의 두번째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났다. 히데요리에게 자신의 좌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히데요시는 다음해에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39명의 영주들에게 다액의 금을 빌려준 죄를 물어 관백이었던 히데츠구를 척결한다.
히데요리 성인식 , 히데요시의 죽음
1596년. 당시 4살에 불과했던 히데요리를 성인식을 통해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한 히데요시는 얼마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시다 마츠나리, 마에다 겐이등의 5봉행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리 테루모토를 필두로 한 5대로를 임명.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토요토미 가문의 안녕을 약속 받는다.
그의 유언을 받들어 특별한 장을 치루지 않고, 교토의 아미다가미네란 지역에 은밀히 매장되었다고 한다.
[ 길었다... 앞으로는 이 이에야스가 천하를 얻을 것이다 ]
히데요시의 사후
천하를 얻었지만, 4살이란 어린나이의 히데요리를 남기고 떠난 그의 사후는 천하인을 노린 이에야스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충성을 맹세한 세력 간의 피할 수 없는 일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이에야스가 천하를 제압하고(그후 오사카 겨울, 여름진에서 승리해 도요토미가문 멸망) 에도막부의 제 1대 정이대장군이 된다.
평민의 출신으로 천하를 얻은 원숭이 [토요토미 히데요시]. 소설에서는 그가 높은 위치에 있음에도 부하들과 격의없이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는것에 핀잔을 하는 네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연줄도 돈도 없는 나는 입 하나로 나의 목숨을 지켜 줄 사람을 늘리지 않으면 안된다"
타고났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계산된 그의 언행, 지략, 퍼포먼스, 그리고 천운을 갖추었던 히데요시. 한국인이 싫어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히데요시는 이렇게 성공했고,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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