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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지도

배경 -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 톨레미왕조의 이집트 (BCE 3rd Century, Alexandria, Ptolemaic Egypt)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이 바빌론에서 갑작스럽게 죽고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은 알렉산더의 장군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지게 된다. 그 중 이집트를 먹은 톨레미(Prolemy)왕은 알렉산더와 함께 어린시절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학문을 배운 영향으로 알렉산드리아를 학문의 도시로 만들기로 마음먹고 사상처음 국가주도의 도서관을 만들기로 한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쪼개진 마케도니아 왕국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건립하며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학문의 중심지로 거듭난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는 그 당시 현존했던 거의 모든 책들이 다 있었는데 이는 일단 알렉산드리아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 (육로나 해로를 통해)은 보따리 검사를 받게되고 만약 현재 도서관에 없는 책을 가지고 있는 게 확인되면 그 책을 압수하여 사본을 만든다음 원본을 도서관에 소장하고 사본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는 강력한 법안을 시행하고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여기서 퀴즈를 내보면,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당시대 Library라고 불리우지 않았다.(단어 자체가 라틴어 기원) 톨레미왕이 멋지게 붙인 이 새로운 기관의 이름은 그리스 지식의 여신인 Muse의 집, Museum이야. 이는 현재 박물관을 뜻하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Museum (상상도)

또한 전세계 상인들/학자들/여행객들이 모여드는 국제도시로서의 자유로운 알렉산드리아의 분위기 또한 여러 학문의 발전을 도왔다. 따라서 본문에서 설명하려하는 지구 둘레 계산뿐 아니라, 역법, 지동설, 유클리드 기하학, 등등 수없이 많은 학문의 발전이 있었다.

인물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관장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에라토스테네스는 BCE 276년 현 리비아의 지중해연안 그리스 도시인 키레네(Cyrene)에서 태어난다. 당시에는 이미 톨레미왕국의 복속도시였고 역시 자유로운 학풍이 꽃피던 곳이었다. 어린시절을 키레네에서 보낸 에라토스테네스는 철학의 본고장 아테네로 유학을 떠나 대략 100년전 플라톤이 세웠던 아카데미(Academy, 플라톤이 Academus의 집을 빌려 학당으로 사용해서 Academy라고 불리기 시작, 지금도 학당을 뜻하는 단어)에서 공부를 하며 고대 그리스철학을 배우며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천재 과학자 에라토스테네스의 두상

그러다 후계자를 가르칠 선생을 찾고있던 톨레미왕조의 왕 톨레미3세의 눈에 띄여 아직 어린아이였던 톨레미 4세를 가르칠 선생으로 초빙되어 알렉산드리아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왕실의 가정교사로 일하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관장역할도 하며 아주 다양한 방면의 학문에서 업적을 쌓으며 수많은 저서를 남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에라토스테네스의 저서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될 때 전부 소실되어 현재 한 권도 전해오지 못하고, 후대의 학자들의 책의 인용구절로만 전해지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산법-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는 어떻게 계산했나?

당시에도 이미 에라토네스는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높이가 100m가 넘는 (대략 40층 빌딩 높이) 파로스 등대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멀리서 다가오는 배가 처음엔 돗대부터 보이기 시작, 나중에야 배 전체가 다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통해 지구의 표면이 곡선형이란 걸 알았고, 태양 - 지구 -달이 일렬로 위치해 있을 때 벌어지는 개기월식때의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지구가 구형이란 것을 확신 할 수 있었다.

고대사회의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파로스의 등대.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높이 100m가 넘는 40층 높이의 고층건물이다.

이렇게 지구가 둥글다는 알았으니 이제 계산만 남았는데, 당시 이미 알려져 있었던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잘 이해하고 있던 에라토스테네스는 무척 단순한 방법으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는 실험을 실행에 옮긴다. 

먼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대략 600마일정도 남쪽에 위치한 마을 Syene (현재 Aswan) 근처의 큰 우물이 1년에 한번 정확하게 태양이 위에서 비춰 깊은 우물의 수면에 태양이 비친다는 것을 알게되어 실제 그 날짜에 아스완까지 가서 실제로 그렇게 되는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 당시 최고수준이었던 왕실 거리기록병(영어로는  pacer, 정확한 걸음거리로 두 지점간의 거리를 재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병사)을 이용해 아스완의 우물에서부터 알렉산드리아의 공터까지 거리를 측정하게 한다. 그리고 그게 4,900 stadia였다.
그리고 1년을 기다린 후 정확히 아스완의 우물에 태양이 비치는 날, 알렉산드리아의 공터에 막대기를 세워 태양 그림자의 각도를 계산한다. 그래서 나온 각도가 7도인데, 각도가 0도인 시에네에서 7도인 알렉산드리아까지 4900 stadia이므로 1도에 700 stadia란 걸 알 수 있고, 원은 360도이므로 지구의 둘레는 700 x 360 = 252,000 stadia란 걸 알 수 있다. 1 stadion은 현대의 거리단위로 516.8 feet이므로 지구의 둘레는 24,662 mile이라고 계산한 셈이었다. 실제 지구의 둘레는 24,860 mile이니 0.78%의 오차로 계산한 셈이다.

여기엔 두가지 가정이 있는데, 아스완과 알렉산드리아는 정확하게 남북으로만 떨어져있다, 그리고 태양은 충분히 멀리있어 태양광은 이 두지점에 평행하게 도착한다라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알렉산드리아가 약간 서쪽에 위치해있고, 보병이 측정한 거리에도 오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집트를 떠나지도 않고, 무척 단순한 도구만을 이용해서 정말 엄청난 정확도로 계산한 셈이다.

계산법

이어진 업적- 지리학의 아버지(Father of Geography)

사실 이건 에라토스테네스의 업적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이 후 지구가 기울기가 23도51분 기울어져있다고 계산했는데 이는 실제 기울기인 23도 46분과 거의 일치한다. 그 후 지구본에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위도와 경도를 이용 지도를 그리는 작업을 시작, 당시 알려져있던 세계인 지브롤터해협에서 인도까지, 그리고 영국에서 아프리카중부까지를 나타낸 지도를 완성한다. 이 책의 이름을 Geographica라고 붙이는데 이는 현재에도 사용되는 영어단어 geography의 시초가 된다. 헤로도토스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것처럼 에라토스테네스는 지리학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지도는 소실되었지만 만약 현존해왔다면 우리는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중심으로 한 경도 대신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경도법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후대에 재구성해본 에라토스테네스의 세계지도


에라토스테네스는 또한 지구와 태양의 거리도 계산했는데 당시 관측장비의 미흡함으로 인해 12.55억 km라고 계산, 실제거리인 약 15억 km와는 어느정도의 오차를 보인다.

헬레니즘시대의 인류지식의 발전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백만권에 달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 중 소실되지 않은 책은 단지 1%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인류의 지식의 발전이 중세 암흑기 없이 현재까지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다면 지금의 발전상은 어떠했을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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