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청나라의 주도권 상실, 청불전쟁 및 청일전쟁
1) 일본의 등장과 대만과 유구왕국
일본은 원래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시절 명의 조공국 이었다.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스(足利義滿)은 조공무역의 막대한 이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감수하고 명의 조공국으로 들어갔으며, 천황이 있음에도 명 천자에게 일왕(日王)의 지위를 받았다.
하지만 16세기가 들어서 일본은 이런 관계를 굴욕적이라 여기고 중국과 공식적으로 관계를 단절했는데, 청이 건국되고 난 뒤에도 이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청나라 역시 일본을 조공국으로 편입할 생각 조차 하지도 않았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메이지 정부는 청과 정식적으로 국교를 맺기로 하고 사절을 보내기로 하고, 처음 총리아문은 교역은 허락하지만 정식조약은 체결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홍장과 증국번은 일본은 조선(朝鮮)과 안남(安南)과 일본과의 지위는 서로 다르므로, 평등한 조약을 체결해야 된다고 주장하여 일본과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1. 타국 영토에 대해 서로 불가침
2. 제 3국과 충돌시 우호적인 상호 협조
3. 상호 영사 재판권
4. 조약항으로만 국한된 관세 무역
5. 일본 상인의 청 내 영사 임명 배제 등이 있다.
일본은 비준서를 교환한다는 명분을 세웠지만 사실 동치제(同治帝)를 다른 열강과 같이 알현하고, 1871년 대만 원주민들이 난파당한 유구인 선원 54명을 살해한 사건을 청의 입장을 파악한 뒤 일본의 유구 종주권을 주장하려고 했다.
이 유구 왕국은 2세기간 겉으로는 청(淸)을 섬기는 듯 했지만 이미 에도막부(江戶幕府)이 후에 사쓰마 번(薩摩藩)에 복속되어서 이중적으로 두 나라를 섬기고 있던 입장이었다.
청나라는 유구에 8차례의 책봉의식을 위해 사신을 파견했지만 중앙 조정에서는 일본에 복속되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에 청 정부에서는 대만이 유구 선원을 살해한것은 청의 조공국과 청 내부에서 발생한 사건이므로 일본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했는데 일본은 청이 대만 주민을 통제 하지 못했고, 이는 청의 사법권이 대만에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하여 이들을 징벌하기 위한 일본의 행동은 청의 권리에 침해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세웠다.
이에 일본 정부는 1874년 4월에 원정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일본이 원정대를 파견한다는 소식을들은 북경 조정은 복건 선정국 대신 심보정(沈保楨)에게 대만 방어를 지시했다.
하지만 심보정은 이 방어를 불가하다고 깨닫았는데 예를들어 심보정 내의 군대에서 쓰이는 대포는 금릉제조국(金陵制造局)에서 주조 했는데 실탄이 발사하면 폭발해 버릴 정도로 청의 무기 수준은 형편이 없었다.
심보정은 일본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이를 거부한 뒤 1874년 일본 내무상 오쿠보도시미치(大久保利通)이 교섭하기 위해 북경으로 갔다.
둘은 사쓰마번 동향 출신이고 막부를 토벌하고 유신삼걸이라고 불리우는 개혁자였지만 후에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 서로 대립하게 된다.
오쿠보는 청 조정이 대만을 효율적으로 통치 하지 못하므로 일본의 상륙은 청 영토의 침략이 아닌 일본의 자위권이라고 주장했으며, 공친왕은 1871년 조약 중 타국 영토에 상호 불가침 작용을 어긴것이라고 주장하며 서로 교섭에서 갈등을 빚었다.
오쿠보는 1871년의 조약은 청일 관계에만 국한 되있고, 청의 사법권을 벗어나는 대만등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영국 공사 토머스 웨이드가 중재에 나서 청은 유구의 희생자에게 10만냥, 대만에 설치한 일본 막사들에 대한 인수금으로 40만냥 등으로 50만냥을 지급하기로 동의한 뒤 서로의 행위를 비난하지 않도록 조약을 맺었는데, 이는 일본의 유구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후에 일본은 유구를 합병해 오키나와 현(沖繩懸)으로 이름을 바꿨다.
2) 이려(伊犁)조약
이려는 러시아 근처에 있던 신강(新疆) 북부의 9개 도시였고 건륭제 이후의 청 영토였다.
이려 계곡은 농업과 광산 자원이 풍부하였고 러시아로서 남하 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1860년데 회족(回族)의 난을 통하여 러시아는 회족의 난으로 인하여 여러 교역에 악영향을 끼쳤고, 러시아 기득권 세력에서는 이 지역을 영구히 점령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정부에서는 청의 통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 질 때 까지만 점령하고 새로운 무역로 개설과 국경선의 재조정을 조건으로 청에 반환하기로 하였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이 제안이 청에 대한 호의를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청이 이 지방에 대해 통치권을 절대로 회복하지 못한다는 판단으로 회족 반란 주동자 야쿱벡과 동시에 교역 협정을 체결하였다.
청 정부에서는 섬서성(陝西省)과 감숙성(甘肅省)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어 염군의 난까지 성공적으로 진압한 좌종당에게 회족의 난까지 진압하라 명을 하고 좌종당은 성공적으로 회족의 난까지 진압하기에 이른다.
이는 청 조정이 신강의 통치권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러시아의 판단에 어긋난 것으로 러시아 공사측에서는 반환 협정에 대해 계속 미루자 북경 총리아문 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하고 만주 귀족출신인 숭후(崇厚)를 일등 흠차대신에 임명하여 전권 대사의 권한을 주고 파견하였다.
국제 외교에 대한 이해와 심지어 이려 지방의 지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숭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정부의 감언이설에 넘어가고 러시아 인들에 기가 질려 속히 귀국하기를 원했다.
숭후는 리비디아 조약을 급히 체결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는데, 그 조약 내용에는 명목상으로 이려를 중국에 반환 하지만 전략 요충지였던 터커스강 유역, 무차르트 통로를 포함하여 이려 지방의 7/10을 러시아에 양도하는 내용이었다.
또 러시아에 500만 루블의 배상금과 일곱 군데 요지에 러시아 공사를 세우고 만주의 페투나와 송화강 까지 항해할 권리를 보장하는 조약이었다.
이렇게 국제적 정서에 이해하지 못하는 관리를 파견한 청조의 무능함은 여지 없이 이려조약에서도 보여줬다.
이 조약의 내용을 들은 북경 조정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이 조약에 절대로 조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숭후는 이미 조약이 성사 되었고 수정과 재협상은 불가하다는 답변을 보냈다.
1879년 숭후는 이 조약에 채결하고 귀국하였는데, 이는 좌종당이 회군의 난을 힘겹게 진압했지만 그 공은 전부 러시아가 가로채는 상황이었다.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을 들은 지식층과 관리들은 조약 서명자에 대한 처벌과 조약 무효화를 외쳤는데, 그 중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은 젊은 장지동(長之洞)이었다.
장지동은 상소에서,
'러시아인들은 요구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탐욕스럽고 거친 것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인 숭후는 굉장히 어리석고 무지함에 틀림없습니다. (중략) 만약 우리가 조약 수정을 요구한다면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국가로 불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장지동은 숭후를 사형에 처하고 전쟁을 치르고서라도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해야 한다고 했다.
청 정부는 증국번의 아들 증기택을 조약의 재협상을 위해 2차 러시아 사절단 대표로 임명했다.
숭후의 처벌은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외교사절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빅토리아 여왕은 서태후에게 개인적인 탄원서를 보내고 러시아는 숭후의 사면을 요구했다.
그리고 숭후의 사면이 이루어질 때까지 재협상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청의 행동에 러시아는 23척의 군함을 중국으로 출동시키고 육군도 만주를 통하여 북경으로 쳐들어 올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청 정부는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사대부층의 정서에 의해 회군 장교들을 요충지에 배치하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상승군(常勝軍) 대장을 지넨 찰스 고든을 초빙한다.
찰스 고든은 로버트 하트를 초청하여 천진에서 이홍장을 만나 중국은 러시아와 전쟁을 임하여서는 안되고 열강과의 전쟁 역시 금물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다구 포대는 쉽게 함락되고 이는 북경의 위협을 가하므로 전쟁을 하려면 수도를 내륙지방으로 옮겨야 한다는 근거를 들었다.
이를 통하여 전쟁은 벌여야 되지 말자는 논리의 강력한 논거가 됬고 러시아한테 청의 우방이 있음을 보여줬다.
증기택(曾紀澤)은 숭후의 예를 따르지 않으려고 외교 전략을 철저히 준비하고 이려 지방에 대하여 연구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국경 문제에 대하여는 단호하고 교역 문제에 대하여 완화하고 배상금을 조정할 목적으로 증기택은 영국 외무성의 지원을 등에 업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다.
러시아는 투르크 제국과의 전쟁, 베를린 회의 이후의 철저한 국제적 고립, 국내의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으므로 청과의 직접적인 교전은 힘들었다.
6개월 간의 협상 끝에 중국 편입을 거부하는 무슬림 난민을 위한 마을을 제외한 이려 지방 전역의 반환을 동의하였고, 배상금은 '군사비' 명목으로 900만 루블로 증가시켰다. 이리하여 새로운 조약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은 청나라의 최초의 외교적 승리로 간주 되었는데 이는 중국 내의 '청의'(淸議)라 불리우던 주전론자의 힘을 싣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중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전쟁을 주장하던 주전파로 이로 인해 청은 큰 곤경을 겪기도 한다.
3) 청불 전쟁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국경 분쟁이 일단락 되자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고대 월남(越南)으로 불리우던 베트남은 기원전 3세기에 중국의 영향권안에 들어오고, 북부 지방은 한 무제 치세에 정복 되었으며, 당나라 때 안남(安南) 도호부를 건설 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중원 왕조의 중요한 외번(外番)중 하나였다.
프랑스의 베트남에대한 영향력은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새로히 왕조를 설립한 가륭제(嘉隆帝) 시절 부터 였다.
가륭제와 그 계승자는 프랑스 내의 세력을 억제 하고자 카톨릭에대하여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프랑스는 선교사 보호 명목 차원으로 군대를 출동시키고 강제로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조약이 있지만 결국엔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격하시켰다.
이에 청은 베트남이 청의 종주국임을 내세워 조약의 무효성을 주장한다.
프랑스는 하노이와 하이퐁 항구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홍하 연안을 따라 요새를 구축하였다.
이에 베트남 정부는 청의 비정규군 흑기군(黑旗軍)의 원조를 요청하였고 청의 정부군 역시 통킹으로 진군 하였다.
이에 이홍장은 중국 해군과 해방(海防) 계획의 완성을 위해 프랑스와의 교전은 반대하였고, 공격할 때만 방어전을 펼칠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공친왕도 찬성하였다.
이홍장과 공친왕의 이런 주장은 청의파라 불리우는 주전파 관료들에게 공격과 조롱을 받았다.
이들은 프랑스는 '못쓰게 된 화살'로 격하시키고 유화책은 적의 움직임을 부추긴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들은 전쟁은 무기가 아닌 정신적 가치로 승리하는 것이고 이홍장을 송대의 매국노 진회(秦檜)에 비유하며 신랄하게 비판 하였다.
조정은 전쟁과 화친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속국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은 있었지만 열강과의 전쟁은 두려워 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청 정부에서는 베트남을 청과 프랑스가 공동 보호국을 하자는 협상안은 파리 정부에서 거부 되었고 프랑스 측에서는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통킹에서 청군은 패배하고 프랑스는 중국 본토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이 이에 이르자 서태후는 공친왕과 4명의 군기대신을 해임하고 이홍장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명령했다.
이홍장은 프랑스 해군 대령 푸르니에와 1884년 협상에 프랑스가 안남과 맺은 조약에 대한 청 측의 승인, 통킹에서의 청군 철수, 프랑스 측의 배상금 요구 포기, 청 침략 배제, 향후 안남과의 조약을 체결할 때 청 정부의 지위 유지 등이 있었다.
이 조약은 청의파를 흥분시키게 만들고 이홍장 탄핵 상소가 올리오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이홍장은 청군의 철수 날짜를 조정에 보고하지 못하였고 통킹의 청군은 프랑스의 철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약속 불이행을 비난하고 거액의 배상금과 조약의 승인을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청의파의 거두 장지동을 양광총독에 임명하고 장패륜(張佩綸)을 복건 함대를 이끌도록 했다.
1884년 8월 23일에 쿠르베 제독 휘하의 프랑스 해군과 복건 함대는 부딪혔는데 1시간 만에 청의 군함 11척이 침몰 당하고 프랑스의 원조로 건설한 복건선정국이 파괴되었다. 전쟁을 주장하던 장패륜은 제일 먼저 달아나고 장패륜이 올린 보고서는 그 과정이 너무 미사여구로 심하게 왜곡되어 중앙 정부에서는 청이 해전에서 승리한 줄 알았지만, 진실이 밝혀져 장패륜은 변방으로 유배 당하고 청조는 프랑스에 선전포고 했다.
청조는 프랑스에 선전포고 하였지만 뚜렸한 전과가 없고 오히려 프랑스가 대만과 화남을 해안 봉쇄하였다.
영국과 독일은 이 일을 청조의 편을 들어 도와줄 기미가 없었고 러시아의 북부에서의 활동 재개 일본의 조선진출 등은 청조의 정부가 동요하기에 충분했다.
프랑스 역시 불안한 정국에서 전쟁을 이끌어가기에 불가피하다고 여기고 강화를 원하고 있었다.
여기에 랑손 전투의 프랑스의 참패는 청조의 체면을 구기지 않고 화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885년에 이홍장은 청은 프랑스가 베트남과 맺은 조약을 모두 인정하며 프랑스는 대만과 팽호(澎湖)에서의 군대를 철수한다고 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청은 10억냥 이상의 은을 지출 하였고 2억 가량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복건함대와 복주 선정국의 파괴 그리고 베트남의 영원한 상실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영국은 미얀마 침략을 감행하여 청의 조공국에서 분리 되기로 자극 하였고 청 역시 미얀마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였다.
이런 남쪽의 조공국 상실은 조선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4) 일본의 조선 침공과 청일 전쟁
(1) 운요호 사건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과 새로운 조약을 맺으러 사절을 파견했지만, 조선의 통치를 맡았던 대원군은 일본의 '천황'이라는 칭호와 동등한 관계를 맺으려 하는 일본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국서의 형식과 대마도주의 직함이 다르다는 핑계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일본은 영국에서 수입한 운요호를 강화도 앞바다에 재차 출격시켜 초지진 포대에서 공격하도록 유도하였다.
일본은 대응 사격을 가한 조선군의 포대를 파괴시키고 조선 수군과의 교전을 통하여 조선군을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하고 민간인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후에 일본은 군함 6척을 파견하여 조선 정부에 압박을 넣었고 청의 조정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특사를 파견하였다.
이에 총리아문은 조선은 비록 청의 조공국이지만 내정과 외교 문제에는 완전한 자유를 누렸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반응을 본 일본은 조선의 문호 개방과 새로운 조약을 맺을걸 요구하였고, 일본과 충돌하는걸 두려워한 청나라는 조선에게 협상에 임하도록 하였다.
이 조약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강화도 조약인데 내용은,
1. 조선은 자주 독립국으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
2. 상호 사절단을 파견한다.
3. 3개의 항구를 개항한다.
4. 일본의 영사 재판권을 갖는다.(치외법권)
이 조약을 통하여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은 약해졌고 일본의 침략을 가속화하기에 이른다.
유구의 상실로 청은 조선의 상실까지 지켜볼 수 없었으므로 조선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근대화 하라고 권유한다.
1882년 미국과 조선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고 두나라 간의 대사를 교환하고 조약항에 영사관을 개설하였으며 평등한 관계를 맺기로 합의하였다.
미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였지만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고 별도의 조회문을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후에 영국, 프랑스, 독일과도 협정을 체결했다.
(2) 임오군란
조선 국내의 상황을 보면 당시에 고종(高宗)이 친정을 시작한 후에 왕비의 가문인 민씨 집안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졌는데, 민비는 개혁을 찬성하고 일본인 교관을 조정하여 새로운 조선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훈련시킨다.
신식 군대의 대우가 좋아지자 자연히 구식군대는 불만에 이르게 되고 이들은 궁궐과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민비는 가까스로 도망쳤고, 일본 공사관이 불타면서 일본 관리 7명이 죽고 공사는 일본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대원군이 재집권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청 해군 제독 정여창과 마건충은 일본의 보복행위를 막기 위하여 대원군을 체포하여 청으로 압송하였다.
고종은 55만 달러의 배상금을 일본에 보내고 사과 사절단을 파견한 뒤 일본군의 공사관 주둔을 허락하였다.
임오군란 이후에 청은 조선에서 청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조선은 청의 신식무기와 차관을 제공 받았다.
이홍장은 청의 교역 감독관을 임명하여 조선의 교역을 감독하도록 하고 원세개(袁世凱)를 파견하여 조선 군의 훈련교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질서를 위하여 청의 6개 대대가 조선에 주둔하였다.
(3) 갑신정변
당시 조정에서는 친청파인 사대파와 친일파인 개혁파가 개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884년에 청불 전쟁 때문에 조선에 주둔한 6개 대대중 3개 대대를 철수한다.
이 틈을 타서 개혁파는 정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갑신 정변이다. 이들은 고종을 구금하고 사대파 관리들을 숙청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3일만에 원세개의 청군에게 진압 당하였고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은 원정군과 특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을 조선에 파견하여 보상금과 사의 표명, 공사관 수축비 부담을 요구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이홍장과의 회담을 위하여 청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청은 프랑스와의 전쟁 중이어서 즉각 일본과의 타협안에 동의 하고 천진에서 협정을 맺는데, 이 협정이 바로 천진협정정이다.
그 내용은
1. 청, 일 양국은 4개월 내에 조선에서 철병한다.
2. 조선 국왕에게 조선의 자위군을 양성하게 하고 그 훈련 교관은 청, 일 양국을 제외한 타국에서 파견하도록 한다.
3. 양국은 조선에 파병할 때 반드시 사전에 통보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즉시 철병한다.
이 조약은 결국 조선을 청과 일본의 공동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청의 종주권의 상실을 의미하고 일본의 파병권을 보장해주는 조약이었다.
한편 러시아는 조선의 영흥만을 점령하고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함에 따라 조선에 대한 열강의 경쟁은 점점 심화되었다.
이에 청과 일본은 조선 문제는 청과의 교섭을 통하여 해결 될 수 있도록 방침을 정한다.
그리고 이홍장은 원세개를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임명하여 청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강화시킨다.
점점 일본과 청의 조선에 대한 갈등은 증가하고 있던 와중에 조선은 홍종우를 파견하여 김옥균을 상해에서 암살한다.
김옥균의 암살은 일본에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청은 법적으로 일본과 관계 없다고 주장하였다.
점점 조선에 대한 청과 일본의 갈등은 심화 되고 있었다.
(4) 동학농민운동 청과 일본과의 갈등 고조
동학이란 최제우가 정부의 학정 및 기독교의 확산을 보고 고민하다 유불선의 정수를 융합한 새로운 종교였다.
정부에서는 동학을 '사학(邪學)' 즉 사악한 학문이라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하는데 1864년에 최제우를 체포하여 사형에 청한다.
1892년 동학교도들은 최제우의 신원 운동을 요구하였지만 조선 정부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해산을 명한다.
이에 동학교도들은 난을 일으키고 이에 조선 정부는 청 정부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에 일본 공사는 원세개에게 적극적인 조취를 취하도록 권하고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방관자 입장을 취한다는 것을 보였다.
하지만 청나라가 조선에 군사를 보내자 즉시 일본은 8천명의 군인을 즉각 파견하였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열강의 대열에 들어가기를 원하였으므로 청 군대와의 전쟁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전쟁을 벌이면 여러 서방국가로부터 비난을 피할 수 없었으므로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고 했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의 조정의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고 조선의 조정은 이홍장의 지시를 받고 일본군이 철수해야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거부를 구실로 일본은 청과의 교전 기회를 엿보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천진 주재 무관인 가미오(神尾) 소좌는 청군 5천명이 조선으로 증파 된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것은 오보였지만 단순한 오보인지 의도적으로 한 건지는 모르지만 메지이 일왕에게는 청나라와 충돌이 불가피 하다고 상주하였다.
일본은 6월 22일에 1차 단교 문서를 보냈고 7월 12일에 2차 단교문서를 보내어 두 국가간의 국교 단절 상태에 돌입 하였다.
이홍장은 서구 세력이 이에 간섭하여 일본과의 관계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에 영국은 '극동에서 변동이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조선의 한성 주변에 중립지역으로 놔두자는 제안을 했지만, 이에 일본은 거절하였다. 미국의 화평주장 역시 거절하였다. 러시아 역시 시베리아 철도가 건설되기 전이어서 대군을 파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점점 전쟁은 불가피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5) 청일 전쟁
당시 청 정부 상황을 살펴보면 동치제(同治帝)가 죽고 광서제(光緖帝)가 즉위 한 쥐 이미 19년이 지난 상황이었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독단에 염증을 느끼고 주변에 황제파라 불리우는 무리가 있었고 이홍장은 서태후의 신임을 받는 관리였다.
황제파는 반(反)이홍장 세력이었는데 이들은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날뛰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젊은 황제 역시 강경파에 이끌리기 시작하였는데 이홍장은 일본과의 전쟁이 승산 없음을 알고 전쟁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황제는 처음부터 주전론을 펼치고 있었고 결국 이홍장은 광서제에게 해군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청의 북양 함대는 새로운 군함을 한 척도 구입하지 않았고 규모는 일본해군에 비하여 컸지만, 구형에다가 속도까지 느려 일본군에 비해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청의 군함이 아무리 일본에 앞서있어도 당시 청 해군은 지휘계통이 일원화 되지 않아서 일본 함대와의 전쟁의 승리는 확실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만약 지휘계통을 일원화 하면 그 지휘관은 이홍장 밖에 없었는데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는 이홍장의 권력 집중을 반대하고 있었다.
국가의 존망보다 권력의 다툼에 더 중점을 두는 왕조의 말기 상황이었다.
그리고 청 해군은 매년 200만냥의 예산이 편성되어있었지만, 북양해군은 100만냥 정도밖에 받지 못하였다.
이화원의 증개축과 서태후의 사치 등으로 인하여 해군의 지원은 점점 감소하였고, 이홍장은 이에 상주문 형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지만 바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북양 해군의 제독 정여창은 실제로 해전에 경험이 거의 없었고 이들의 배 경험이란 유럽에 파견되어 회황하는 군함을 타고 돌아오는것이 유일한 경험이었다.
나머지 해군 장교들은 복건선정국에서 교육받은 복건파였다.
제독은 안휘파인 정여창이었고 장교들은 복건파였으므로 서로간의 상명하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와 같이 많음 문제를 않고 청은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선전포고전 7월 25일에 일본은 영국 선적의 증기선 고승호를 격침시켜 영국인만 구조되고, 청군의 950명이 익사하였고 8월 1일에 서로 선전포고 하였다.
고승호가 격침되고 청군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지고 이후에 여러 전투에서 큰 고전을 겪게 된다.
청군은 아산에서 20키로 떨어져있던 성환에 2천명을 배치하고 후방인 공주에 1500명을 주둔시켜, 남북 협공을 하려했지만 병력과 사기로 이 작전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청군 1만명이 있는 평양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군과의 성환에서 교전은 참패였다. 이 때 지휘관 섭초지는 일본과의 전투가 승리라고 보고하였고 북경의 우군과 합류하겠다고 하였다.
이 교전으로 일본군의 사기는 상승하게 된다. 이미 고승호의 침몰과 성환 전투의 패배는 청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하였고, 이는 결국 청군의 패배로 이어지게 된다. 일본은 대본영을 히로시마로 옮기면서 이 전쟁이 천황의 친정임을 선포하였다.
이는 전선의 일본군의 단합과 일본 전국 국민이 일치 단결하게 되는 결과가 되는데 반면에 청 군대는 서로 파벌을 이루며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청 군대 내에서는 이들을 아우를 지휘관이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북경 조정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여기는 섭지초를 통솔자로 임명하였다.
평양에 주둔해있던 청군 내에서는 섭지초가 비참하게 패배하여 온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임명에대해 엄청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단결하지 못하였다.
이 때 일본군이 북상하였는데 병력의 수는 총 1만 7천명이었고 청군은 1만 3천명 정도였다.
원래 전쟁에서 포위를 하려면 적어도 수비병력의 3배가 필요한데, 일본군은 당시 군량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여 후속 부대를 기다리면 굶주림에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노즈 미치무라 중장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청 내부에서는 섭지초가 싸우지말고 후퇴하자는 주장을 벌이고 좌보귀는 이에 반대하여 서로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병참선을 한참 늘여 놨기 때문에 청군은 이에 반격해야 했지만 지휘관들의 의견이 통일 되지 않아 일본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대동강을 사이로 서로 공방전이 벌여지고 일본군의 탄약은 바닥이 났고 노즈 중장은 백병전 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후퇴를 하여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지만 평양성 꼭대기에 백기가 걸리고 청군은 앞을 다투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 때 청군의 전사자는 2천명 일본군의 전사자는 180명이었다.
해전 역시 육전과 다를바가 없었다.
당시 청 해군(북양함대)은 제해권 개념도 없었고, 지휘관도 능력위주로 선발 되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 관계에 의해 오가는 것이었다.
이런 낙하산 지휘관은 더더욱 그 능력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청나라는 군함은 일반 배와 마찬가지로 수송선 개념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대동구에 증원군을 상륙시키고 다시 청나라의 바다 경계를 지키려 출발준비를 하던 와중에 일본의 연합함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당시 북양함대는 연안 경비와 병력 운송만을 목적으로 하고 일본군은 제해권 관념을 갖고 전투적이었다.
이들의 함대 자료를 비교해보면,
청 일본
배수량 3만5천톤 4만톤
철갑선 5척 1척
평균 속력 14노트 16노트
실제 마력 4만 6천마력 7만 3천마력
증포 21문 11문
속사포 6문 67문
철갑선의 수는 청이 앞섰지만 무기는 일본군이 앞서는 상황이었고, 군대의 사기 역시 일본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전투는 5시간 동안 되었는데 청의 북양함대는 초용, 치원, 경원 3개의 철갑을 잃었다.
일본 해군은 정원, 진원의 두 거함을 집요하게 노려 포를 집중시켰는데 200발의 포를 맞고도 침몰하지 않았다.
5시간이 지난 후 두 해군은 서로의 탄약고가 바닥나서 자동적으로 전투가 끝나게 되었다. 명백한 청나라 해군의 패배였다.
잇다른 패전으로 이홍장을 탄핵하는 세력들은 늘어났고 점점 북경 조정의 여론은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북양 함대는 산동반도의 위해위(威海衛)로 이동하고 일본군은 청의 요동 여순을 함락하였다.
점점 전선이 청나라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으로서도 이는 엄청난 부담이었고 청나라 역시 강화를 원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여기서 6만명의 민간인들을 사살하여서 국제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서로간의 강화는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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