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하던 해적선의 해적기와 그 의미
스프리그스의 깃발은 최초의 해적기라고 불리는 것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해적기의 그림과는 다른 점이 많다. 검은 깃발에 붉은 해골이 그려진 스프리그스의 깃발의 디자인은 사실 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사실, 이 그림은 스프리그스의 예전 파트너였던 에드워드 로우가 만든 것이다.
스프리그스가 언제 해적질을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와 로우는 1724년 서로 갈라섰다. 스프리그스는 로우의 배였던 'Delight'호를 차지하고는 카리브해로 항해했다. 그는 1725년까지도 계속해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으며, 온두라스 해안 북쪽의 로탄 섬에서 카리브해에서 해적질하며 붙잡은 선원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그와 그의 선원들은 후에 버뮤다와 세인트키츠섬 주위에서 몇 척의 배를 더 나포했다. 그러나 1725년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은퇴한 군인이었던 보넷은 수년간 가족들과 함께 평화롭게 가정을 꾸려나가다가 별안간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해적이 되었다. 다른 해적들이 다른 배를 빼앗아 해적질을 시작한 것과 다르게, 그는 돈을 주고 정당하게 배를 구입해 대포를 장착하여 해적선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초짜 였고, 항해술도, 배를 빼앗는 능력도 없어서 고용한 해적들이 대부분 일을 처리했다. 당시 악명 높은 해적이었던 '검은 수염' 티치를 만나서 배를 약탈당하고 티치에게 복수를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복수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검은 수염이 해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한 달 뒤 교수형을 당했다.
보넷의 깃발은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수평으로 그려진 길다란 뼈다귀 위의 해골이 심장과 단도 사이에 위치한 형태로 알려졌다. 심장과 단도는 삶과 죽음을, 해골과 긴 뼈는 저울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그의 깃발이라는 것이라는 정확한 증거는 없다. 위 그림의 출처는 1939년 영국 해양박물관에 기증된 날짜와 출처가 불분명한 양피지였다. 최근에는 보넷의 깃발이 어두운 빨간색이나 사신의 머리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무디는 일반적인 해적기의 형태를 완전히 거부한 또 다른 해적기를 사용했다. 그는 유명한 해적 바솔로뮤 로버츠의 선원으로 일했으며, 1713년과 1718년 북부, 남부 캐롤라이나 해협 주위에서 활동했는데 특히 악독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해적기도 마치 이를 나타내는 듯 하다. 그는 1722년 붙잡혀 가나에서 교수형 당했다.
대부분의 해적이 사용했던 검은 바탕에 하얀색 그림 대신, 무디는 빨간 바탕에 금색 그림을 그렸다. 빨간 바탕은 해적기를 더 위협적으로 보이게 만드는데, 그 당시 사략선이나 군함에서 빨간기를 휘날리는 것은 '누구도 살려두지 않겠다'는 것을 뜻했다.여기에 무디는 단도를 들고 있는 팔과 뼈다귀가 교차된 해골, 그리고 날개가 달린 모래시계를 그려 넣었다. 이 것은 시간이 날아간다, 즉 시간이 다 되었다는 의미였다.
윈은 우리에게 익숙한 해적기를 달고 다녔던 최초의 해적들 중 한 명이다 그의 깃발은 교차된 뼈 위에 하얀 해골, 그리고 그 아래에 모래시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이 깃발을 본 사람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으며, 항복하는 것 만에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뜻했다.
윈의 해적기의 생김새를 전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은 군함HMS Poole을 지휘했던 존 크랜비 선장이었다. HMS Poole은 1700년 7월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윈의 해적선을 격퇴했다. 크랜비는 윈의 깃발에 교차된 뼈, 사신의 머리, 그리고 모래시계가 그려져 있었다고 전했다.
HMS Poole에게 공격 당한 후, 윈은 카보베르데 제도를 떠나 카리브해로 항해했으며, 그곳에서 영국과 스페인의 배들을 약탈했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해적기들 사이에서 존 퀠치의 깃발은 유독 눈에 띈다. 사실 이 깃발은 해적기가 아니라 잉글랜드의 국기이기 때문이다. 해적이 되기 전 퀠치는 영국의 사략선Charles 에서 중위로 일했다. 1703년 7월, 이 배에서 선상반란이 일어났고, 퀠치는 선원들에 의해 새로운 선장으로 뽑혔다. 기존의 선장은 바다로 던져졌다.
퀠치는 즉시 그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항해하며 9척의 포르투갈 배를 공격해 10,000파운드 가치의 물건들을 빼앗았다. 이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28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그러나 포르투갈은 그 당시 영국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노략질을 할 정당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해군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으며, 1704년 6월 30일 보스턴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토마스 튜의 깃발 또한 검은색 바탕을 제외하고는 통상적인 해적기의 형태를 피하고 있다. 대신, 커틀래스를 들고 있는 팔 하나가 그려졌는데, 이 무기는 그 당시 폭력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심볼이었다.
그의 깃발이 의미하는 것처럼, 튜는 앞길을 막아서는 것이라면 아무 거리낌없이 죽여버렸기 때문에 적들은 생존을 위해서 무조건 항복해야 했다. 이런 악명이 널리 퍼진 덕분인지 튜가 해적질을 한 단 3년 동안(1692~1695) 그가 빼앗은 재물은 8천 파운드, 지금으로 따지면 20억 원에 달했다. 튜는 1695년 사망했다.
랙햄은 비디오 게임인 어쌔신즈 크리드 덕분에 유명세를 탄 해적이다. 그러나 그가 실질적으로 해적질을 했던 기간은 겨우 2년이다.(1718 – 1720) 랙햄이 해적질에 가담한 첫 기록은 1718년으로, 그는 원래 찰스 베인의 배였던 Ranger 호의 갑판수였다. 베인이 선장자리에서 제거된 후, 랙햄은 투표로 선장이 되었다. 이후 해적으로 악명을 떨치며 여러 척의 배들을 지휘했는데, 이 중에는 Kingston 호가 유명하다.
그는 1720년 영국해군의 해적 사냥꾼 조나단 버넷에 의해 붙잡혔고, 이후 자메이카의 포트로열에서 교수형 당했다. 어떤 배를 지휘하건 간에, 랙햄은 늘 같은 해적기를 사용했다. 그림처럼 교차된 칼 위의 해골 그림이다.
이 리스트에서 가장 유명한 해적들 중 하나인 에브리는 비록 활동 기간은 짧지만 (1694~1696) , 단일 해적단으로 활동한 해적들 중에서 가장 많은 보물을 빼앗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흑인 노예를 매매하는 일을 하다가 스페인의 사략선에 고용되었다. 이후 카리브해에서 정박 중 선상 반란이 일어났고, 에브리는 선장으로 추대되어 다른 해적들과 연합을 맺는다.
에브리는 1695년 무굴의 상선들을 습격하여 30만 파운드~60만 파운드에 달하는 보물을 빼앗았는데, 이는 오늘날 거의 600억 원~14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 습격 이후 에브리는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졌다. 1696년 이후로는 그의 위치나 활동에 대해 아무것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
바솔로뮤 로버츠는 겨우 3년 동안 해적일을 했지만 가장 성공한 해적들 중 하나일 것이다. 1719년부터 1722년까지 그는 400건이 넘는 약탈을 저질렀다. 로버츠는 1719년 6월에 해적질을 시작했다. 그는 일반 배의 선장으로 항해를 하던 중 호웰 데이비스가 이끄는 해적단에 의해 나포 당했는데, 이 해적들은 로버츠와 그의 부하들에게 해적단에 들어올 것을 강요했다. 그 후 그들은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에 있는 프린시페 섬으로 항해를 떠났다.
프린시페 섬에서 데이비스 선장은 포르투갈의 수비대에게 해적이라는 것이 들통나버렸고, 결국 수비대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데이비스가 사망하자 새로운 선장이 선출되었는데, 그게 로버츠였다.비록 처음엔 해적단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던 로버츠였지만, 결국 선장 자리를 수락하게 되었다. 그는 기왕 해적이 될 것이라면 일개 선원보다는 선장이 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고 한다.
선장이 된 후, 로버츠는 위에 있는 그의 첫 해적기를 그렸다. 모래시계를 들고 있는 사신과 로버츠 그 자신을 그려 넣은 것이었다. 로버츠는 두 개의 해적기를 사용한 유일한 해적이었으며, 두 깃발 모두 유명한 해적기로 알려졌다. 첫 해적기는 선장이 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만들어진 반면에, 두 번째 해적기는 1720년 2월이 되어서야 만들어졌다. 로버츠는 슬루프선 두 척이 자신의 배를 쫓아오는 것을 발견했는데, 각각 발바도스 섬과 마르티니크 섬에서 보낸 배였다. 그는 두 섬의 거주민들에게 복수를 다짐하고는 두 번째 깃발을 그렸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해골 두 개를 밟고 서있는데, 왼쪽 해골에는 ABH(발바도스 인의 머리), 오른쪽 해골에는 AMH(마르티니크 인의 머리)라는 약자가 쓰여져 있다.
1722년, 그는 HMS Swallow호가 쏜 포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으며, 죽기 전에 자신의 장신구와 무기를 품고 바다에 수장시켜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선원들은 그의 말대로 돛으로 로버츠의 몸을 감싸서 바다 속에 밀어 넣었다. 로버츠의 유골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리스트 해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해적인 에드워드 티치는 그 명성 만큼이나 유명한 해적기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호르니골드 해적단에 입단하여 해적 생활을 시작하였고, 티치와 그의 첫 해적선 Queen Anne’s Revenge는 여러 미디어에서 그려지면서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많은 유명세를 얻었다. 해적 연합을 결성하여 찰스턴 항구를 봉쇄하기도 하고, 약탈한 배의 선원들을 모두 죽이는 등 잔인한 악행도 저질렀다.
깃발에는 심장을 찌르고 있는 해적이 건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적들을 겁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다른 요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남아있지 않다. 역사학자들은 이 깃발이 실제 검은 수염의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으며, 유명한 저서인 "해적들의 역사"에서는 검은 수염이 특정한 깃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적어놓고 있다. 책의 삽화에는 일반적인 깃발을 그려뒀다.
그러나 대중들은 이 유명한 해적기를 계속해서 검은 수염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노스 캐롤라이나에는 2018년 오크래코크 섬의 전투 및 검은 수염의 죽음을 기리는 300주년 기념행사에 이 해적기를 단 페리선들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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