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임진왜란 중 정문부의 통쾌한 반격, 북관대첩
1592년 임진왜란 발발하였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점령하였다. 이윽고 일본군은 곧바로 여러갈래로 나뉘어 진군하는데, 각 군 회의 끝에 제비뽑기로 다음 진군 경로를 선택하기로 했다.
제비뽑기의 결과로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제 1군은 북쪽으로 몽진한 선조를 잡으러 평양 방면으로 진군하였고,
가토 기요마사의 제 2군은 함경도 방면으로 진군하였다. 가토는 '약장수 출신의 농간'이라 투덜거리며 떠났다고 한다.
당시 함경도 방면 일본군 라인업
일본 제 2군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일본 제 2군 대장. 히데요시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명
나베시마 나오시게(과도직무)-전국시대 당시 오토모의 6만대군을 700여기로 격퇴한 류조지가의 명장
그외 가토 우마노조, 사가라 요리후사 등 휘하 총 '2만 2800명'
1)해정창 전투와 왕자 생포
가토의 제 2군은 임진강 전투 참가 이후 곧바로 이동하여 길잡이 두명을 앞세워 함경도에 도착했다. 곧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가 함경도에 있다는 첩보를 접한 가토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영흥과 함흥을 수비하게 하였고, 사가라 요리후사에겐 북청을, 또 단천에 군을 남기고 자신은 북진을 계속하였다.
이때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근왕병을 모집하러 함경도에 와 있었는데 가토군이 당도했다는 급보가 날라오자 급히 함경북도 절도사 한극함에게 일본군을 요격하라고 명했다.
명을 받들어 절도사 한극함이 육진의 기병 1천명을 모아 수비하기 수월한 마천령에서 일본군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일본군의 진격속도는 그가 예상하는것 보다 훨씬 빨랐다. 일본군이 이미 마천령을 넘어버렸기에 양 군은 해정창에서 만나 접전을 벌였다. (1592년 7월 17일 해정창 전투)
한극함의 함경도 기병들은 그간 가토가 봤던 조선 지방군 오합지졸들과 다르게 여진족과의 전투로 다져진 베테랑들이었다. 게다가 당시 전장이었던 해정창은 개활지였기에 함경도 기병들이 날랜 기동성을 이용하여 화살을 쏘아대자 일본군은 사상자를 내며 쫒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쌀가마니로 바리게이트를 치며 조총으로 응사하자 함경도 기병들의 피해도 상당하였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인해 부령부사 원희 등 300명이 전사하였고, 분노한 한극함이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매복에 당해 결국 패배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함경도 기병에게 호되게 당했는지 한극함에 대해 의외로 "기병을 잘 다루는 용맹한 장수였다." 라고 기록했다.
믿었던 기병들이 패배하자 함경도 지역 민심이 소란스러워졌다. 안그래도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는 함경도 지역에서 왕자랍시고 수령들이랑 백성들을 핍박했었는데 국경인, 정말수, 국세필 반란분자들이 이를 부추겼고 조정에 불만을 가진 무리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수가 무려 5천명이나 되었다.
국경인 무리들은 가토군과 내톤하였고, 이들에 의해 왕자들은 결국 포로로 잡혀 가토에게 그대로 보내진다. 이제 함경도는 가토군에게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더불어 일본군에게 종군하겠다는 순왜(항복한 조선인)는 3천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전세에 가토는 기세등등하였고 항복한 순왜들을 앞세워 조선 국경을 넘어 만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진족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 가토는 곧 노토부락의 여진족들에게 발리고 함경도로 회군한다.
가등청정이 군사를 인솔하여 두만강을 건너 깊숙이 노토 부락까지 들어가 성을 공격하니 호인이 사방에서 일어나 요격하여 사졸들의 사상자가 많았다. 이에 진로를 바꾸어 종성의 문암을 경유하여 강을 건너 온성·경원·경흥에 차례로 들어갔다가 해변의 협로를 따라 경성으로 돌아왔다. 선조 수정실록 26권, 25년(1592 7월 1일) 16번째기사- 함경남·북도가 적에게 함락되다 中
*이때 해정창 전투에서 졌던 패장 한극함이 여진부락에 숨어있다가 가토군에게 붙잡힌다.
가토를 털어버린 노토부락 여진족들은 신이나서 조선 국경을 마구 넘어와 약탈을 벌였고 더불어 가토를 등에 업은 국경인 무리들까지 수탈을 일삼으니 함경도는 난장판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정문부가 등장한다.
* 조선은 이 사건을 두고두고 기억했다가 전쟁이 끝난 1600년 기병 5천명을 동원하여 노토부락으로 쳐들어가 싹 다 불태워버린다.
2)정문부의 등장
정문부는 1588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문관출신인데 한성부참군(무관) 1589년 홍문관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 겸 중학교수 1590년 사헌부지평으로 지제교를 겸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엔 함경도북평사(무관)에 재직중이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정문부는 가토군과의 전투에 부상을 입어 도망하여 유생 지달원 집에 숨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마 북평사였으니 함경북도 절도사 한극함 휘하 소속으로 해정창전투에 참가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함경도가 일본군도 모자라서 여진족과 반란분자로 인해 소란스럽자 그는 지달원, 강문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 10월 20일)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키자 피신하였던 경성부사 정현룡과 경원부사 오응태까지 가세하였고, 반란군 무리 중 하나인 국세필은 이를 보고 겁이나 정문부에게 항복하였다. 경성을 점령한 정문부는 일단 국세필을 놔두다가 국경인, 정말수를 제거한 다음 그를 처리한다.
그리고 일본군의 순찰대를 기병대로 모두 죽여 이 소식을 모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길주에 주둔하던 가토 우마노조가 경성과 연락이 끊겨 의심하여 휘하의 92명을 경성으로 보내자 정문부는 또다시 기병대를 보내 모두 쓸어버렸다. (경성전투)
한편 반란군 3대장 중 우두머리 격이었던 국경인은 1592년 10월 회령에서 정문부와 같은 편인 신세준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정말수 뿐이었다.
정말수를 처리하기 위해 정문부는 그가 주둔하던 명천으로 진군한다. 그리고 휘하 권관 구황과 강문우에게 총 60명의 기병대로 명천을 습격하라 하였다.(회령, 명천 전투)
정말수 또한 역시 정문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 또한 붙잡혀 처형당하였으니, 함경도 반란군 3대장 국경인, 국세필, 정말수는 모조리 진압당했으며 이를 해낸 정문부와 그의 부대는 기세등등하였다. 어느 덧 그의 휘하에는 의병이 3천병이나 모였다.
이제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가토가 이끄는 제 2군 이었다.
3)정문부 VS 왜군
3000명의 정문부 의병부대가 상대해야하는 함경도의 일본군은 22800명. 그러나 일본군은 해안선과 보급선을 따라 길게 포진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정문부의 부대는 흩어진 일본군들을 철저히 각개격파 한다. 정문부는 우선 군사를 셋으로 나뉘어 천명으로 길주성에 매복하였다.
그리고 길주 북쪽에 200명, 고참에 400명을 매복시켰는데 마침 명천 갯마을 가파리 마을을 약탈하고 돌아오던 일본군 1000명이 매복 중이던 조선군 200명과 교전한다. 그러나 일본군의 숫자가 많아 조선군이 퇴각할려는 찰나 고참에 매복하고 있던 300명의 조선기병이 합세하였다.
조선군은 기병대를 중심으로 평지 돌격전을 펼쳤고 일본군은 기병에 발려 큰 피해를 입고 산악지대로 패퇴하였다. 그리고 일본군들은 곳곳에 매복해 있던 조선군에게 괴멸되었다. (1592년 10월 30일 석정령 전투)
북관대첩비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깃발 20개, 갑옷 50벌, 투구 8벌, 창 16자루, 조총 26자루, 탄환 646개, 화약통 15개, 말 118필, 수많은 일본도 등을 노획했다고 한다.
11월 1일 정문부는 길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이 심해 고전하던 차, 마침 영동의 일본군들이 약탈질을 벌이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그는 자기 휘하의 정예병력을 데리고 영동의 일본군을 토벌하러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300여명의 일본군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성기를 자르고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어 10여리에 늘여 놓았다.
-북관대첩비-
그러나 갑자기 함경감사 윤탁연이 뜬금없이 정문부를 모함하였다. 윤탁연은 평소에 정문부의 전공을 질투하여 조정에다가 그를 헐뜯는 상소문을 보낸 것이었다.
“윤탁연의 치계에 의하면, 수령이나 변장들이 적의 선봉을 보기도 전에 수백 리를 도망쳐 나와서는 타도(他道)로 들어가 군관이 되기도 하고 혹 의병을 모은다하기도 하며, 혹 장수라고 일컫기도 한다고 하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생략)
-선조 31권, 25년(1592 10월 16일) 1번째기사-
비변사가 타도로 가서 장수 행세를 하는 수령이나 변장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다.
윤탁연의 모함으로 의병부대의 지휘혼란이 야기되어 정문부가 물러나자 그가 없는 함경도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결국 정문부는 1593년 1월 13일 다시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의도치않게 잠시 쉬었던 정문부는 1월 19일, 길주와 영동 남쪽에 있는 단천 공격을 감행하여 왜군 200명을 유인해서 기병대로 또 쓸어버린다.
이때 가토 2군 본대는 정문부에게 포위당한 길주성으로 진군중이었으며, 그간 정문부의 유격전에 놀아난 그가 정문부의 부대를 잡으러 이번엔 직접 나섰던 것이었다.
1월 28일 정문부가 포위하던 길주성을 구하러 일본군의 구출부대 1천명이 마천령을 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정문부는 기병 600명을 미리 매복시켜 그들이 통과할때까지 내버러 둔 다음 통과하자 마자 기병대로 일본군의 앞 뒤 허리를 치며 유린하였다. 조선기병대의 치고 빠지기 작전에 일본군은 혼비백산하여 패주직전까지 몰렸다.
길주성 구출부대가 전멸당하기 직전에 일본군에게 다행히 가토의 대군이 도착했으며, 가토부대가 쫒아왔지만 정문부는 당연히 퇴각했다.
이 날 정문부 부대의 피해는 주을온 만호 이희당과 이붕수 포함 25명이었다.
이날 저녁, 전의를 상실했는지 일본군은 길주성을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이를본 정문부 부대는 길주성에 입성하고 군 일부만 남긴 채 퇴각한 일본군을 추격하는데, 이때 가토의 본대는 이미 함흥으로 향한 후 였고 후미엔 길주성 구원부대와길주성 주둔부대가 철수 중이었다.
정문부는 후미의 일본군을 기병대로 타격했고, 퇴각하던 길주성 구원부대와 주둔부대 일본군 총 3천명 중 절반 이상이 조선군에게 죽었다.
그리고 가토의 본대 또한 피해가 속출하였는데 이는 2군 대부분이 규슈 남부지방 출신이 대부분인지라 함경도의 극한의 추위로 인한 동사자, 그리고 그간 정문부의 유격전으로 인한 피해와 보급부족으로 인해 아사자가 지속적으로 속출하였기 때문이었다.
2월 중순. 드디어 정문부가 군을 이끌고 함흥으로 향했으나 이미 가토의 제 2군은 4일에 함흥에 집결하여 11일에 남쪽으로 철군한뒤였다. 그간 지속적인 피해 발생과 더불어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수복으로 인한 여파였다.
가토의 일본군 제 2군 '2만 2800명'은 28일 한양에 집결한 후 사망자를 집계하였는데 8,864명으로 나왔다.
당당하게 함경도로 향했던 그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역사에선 1592년 10월 20일~ 1593년 2월 28일까지 발생한 이 전투를 북관대첩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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